since.2000.09.07

좀 뜬금없지만, 가와사키 언니네 막내 아들래미가 학교 연극부에서 대회에 나가 승승장구, 드디어 관동대회까지 올라갔다는 이야기에 그 연극을 보러 향했습니다.(이 관동대회 다음은 바로 전국대회라네요)
결과 발표는 보지 않고 왔는데 별 말이 없는 걸로 보아 전국대회 도전은 실패한 듯합니다. 그래도 생긴지 3년된 연극부가 최초로 단숨에 관동대회까지 올라왔으니 꽤 훌륭하죠.

왼쪽은 팸플릿 표지, 오른쪽은
각 연극작품팀마다 그 자리에서 써서 복사해 만든 듯한 연극대회 속보판이라네요.
자신의 연극과 팀, 출장 소감에 대해 써놨습니다.
이 학교 학생들의 출장 소감은,
관동대회!
원정을 가리라 생각했으나 가까운 곳이었다.
기쁘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대회 장소가 얘네 학교가 있는 곳에서 크게 멀지 않은 요코하마였음..;)

일본의 다른 고등학교들이 다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니 아들이 다니고 있는 사립 학교는 부서 활동이 상당히 잘 되어 있어서 우리나라처럼 그냥 이름만 걸어놓고 자습하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합숙하면서 연극 연습도 한다네요(언니는 공부에 방해된다고 질색하지만. ^^;).

만화에서 자주 보던 일본 고등학교 연극부의 연극!이라는 게 어떤건지 궁금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로 생각했던 이상으로 수준이 높아서 왠만한 극단보다 실력이 좋았고 참으로 오랜만에 어린 열정이 풋풋하게 느껴지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작품 제목은 それください(그것 주세요).
더 이상 좋은 플랫도 떠오르지 않고 한계에 부딪혀 자신이 직접 죽음을 경험해야겠다고 결심한 중년의 유명한 서스펜스 작가 호우즈키.
2차원의 여자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에서 변태취급을 받는 걸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펜네임 절망씨(제 조카가 맡은 역할!).
더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죽음이라는 결론을 내려야겠다는 토모히로.
서로 너무나 사랑하는 사이지만 주변의 질타를 참을 수 없어 함께 죽으려 한다는 료와 여장남자(이 학교 연극부가 남자밖에 없음..;) 마이.
그리고 자살할 방법과 기타 준비를 담당한 펜네임 카오스씨.
이들은 인터넷 자살 게시판에서 만나 함께 모여 자살을 하기로 계획합니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서로의 자살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자살 계획을 맡은 카오스씨를 기다리지만 사실 알고 보니 이 카오스씨는 함께 자살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살짝 맛이 갔는지 ) 자신이 믿는 신에게 받은 계시로 두 사람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자살자를 모았다며, 애초에 다섯명을 모집한 건 이전에는(…) 사람들이 적게 모여서 넉넉하게 뽑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날이 선 칼을 들고 자살자를 모집하는 카오스씨.

모두 자살을 결심하고 온 사람들이기에 한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설파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뒤집어졌던 게 바로 오타쿠 절망씨의 주장이었지요.

절망씨:라디오에서는 온통 성우들이 나오고 TV에서는 애니메이션만 틀어대는데 그러면서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을 변태 취급하는 세상이 나쁜 거야! 심지어 NHK에서도 애니메이션을 튼다고!! 이런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토모히로: NHK 총합(애니메이션 같은 건 절대 안 나오는 교양채널)을 보지 그랬어.

모두 죽겠다고 앞다투니 고민하던 카오스씨는 알아서 결정해서 알려달라며 그들을 남겨두고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그리고 다들 계속 자신의 자살 이유가 얼마나 정당한지, 상대방의 자살 이유는 죽지 않아도 될 문제인지 설전을 벌입니다만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더 이상 죽지 않아도 될 위안을 받으면서 ‘모두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카오스씨가 돌아오자 모두 ‘우리 모두 죽지 않기로 했어’라고 말하자 카오스씨는 당황하며 그렇다면 ‘신의 계시를 지키지 못한 내가 죽어야 해’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칼을 향하지요.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은 카오스씨가 죽지 않아도 되는 이유, ‘그 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고 나가버립니다.

고등학교 창작 작품치고는 꽤 짜임새도 있고 지루해질 즈음에 한번씩 개그가 나오는 타이밍도 적절했습니다. 조카가 맡은 절망씨가 주로 그 역이었는데 그녀석이 얼굴이 잘생기지는 않아도 마른 체구에 귀염성있는 타입이다보니 지금까지 본 오타쿠 중 가장 깜찍한 오타쿠였네요. 연기도 좋았어요. : )
저만 그렇게 생각한 줄 알았더니 밖에 나와 연극팀에게 한마디씩 남길 수 있는 게시판에 온통 ‘귀여운 절망씨’에 대한 뜨거운 반응들로 도배가 되어 있더군요(그 중 제일 웃겼던 건 ‘절망씨가 오타쿠가 된 건 모두 NHK 탓이예요’ 였음. ^^; 두번째는 ‘절망씨 모에~~’)

토, 일에 거쳐 모두 13팀이 경합을 벌였다는데 대회장이 거의 다 찰 정도로 관객도 많았고 각 학교에서 응원나온 동급생, 선후배들이 북적거려서 마치 학교 축제 같기도 하고 꽤 왁작왁작하는 느낌이 좋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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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esponses

  1. 크리스

    하핫, 그 연극 한번 보고싶네~ 나도 절망씨 모에~ 한번 해보게. ^^;

    1. 리츠코

      연기 의외로 잘하던데. 목소리도 큰 편이고. 좀 놀랐음. 키도 많이 컸더라.

  2. Tom

    대회라…
    일종의 콩쿠르인 것인가?
    그러고보니 우리나라에도 청소년 연극제 같은 게 있었긴 했지만 대회’라는 이름이 붙고 보니 어감이 생소. ^^;

    이틀에 걸쳐서 열렸다고 해도 13팀이면 꽤 많은 팀인지라 공연 스케줄이 빡빡했을텐데, 이런 경우라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공연순서도 심사에 영향을 주지 않았겠남? 심사하는 쪽도 로봇은 아닐테니까.

    * NHK 얘기는 꽤 웃겼음.
    * 남학교 연극부에서 희곡을 선택할 때 가장 고민되는 것은 역시 여자 출연진의 캐스팅. (-,.-;) 지금이야 많이 풀려서(?) 우리나라에서도 저런식의 해결책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옛날에는 정말 난감. 선택의 폭이 확~ 줄어들어버리는 거지. 고육지책으로 타 여학교와 조인트를 한다거나(그 쪽도 비슷한 고민을 하긴 하니까..) 무조건 여자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으로만 가게 돼지. 뭐, 여학교는 그나마 나은게 여자가 남장을 하고 남자 역할을 하면 그럭저럭 봐줄만 하지만, 남자가 여장을 하고 여자 역할을 했었다면, 그 시절 분위기로는 객석에서 의자가 날아왔을 거야.

    1. 리츠코

      연구 대회니까 콩쿠르랑 비슷한 개념일 것 같아요. 얘네는 저 연구란 말 잘 붙이던데 특별히 의미를 모르겠더란. -_-;

      다른 팀 공연은 못봤지만 어제 내가 본 공연도 상당한 수준이었는데 그보다 나은 팀이 가져갔다는 것일테니 그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지던데요. 뭐 형부 말로는 소재의 한계상 아마 저기까지일거다 라고 하셨지만.

      저 학교는 심지어 남녀 공학인데 사립은 말만 남녀공학이지 남녀가 아예 건물도 따로 쓴다네요.(그리고 그 가운데에 수영장이 있다는 게 제일 웃겼음)
      멤버가 남자밖에 없으니 아예 캐릭터를 남장여자라고 설정한 것 같은데 역할 맡은 애가 어찌나 곱상하니 귀여운지(다리도 날씬했다) 그냥 여자역을 해도 되겠다 싶던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