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받으러 다닌 지 그럭저럭 1년을 넘긴 시점에서 짧게나마 정리 삼아 기록.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언제쯤 치료가 끝나는 걸까’ 초조했는데 지금은 맘 편하게 ‘그만 가도 될 것 같은 날이 오면 그만 가는 것’이라고 마음먹고 있다.
우리나라에 범람하는 상담 예능들은 해롭다.
전문가들이 한시간 남짓 방송시간 동안 ‘당신은 이래서 이렇고 저래서 저런 것’, ‘이렇게 하라’고 말하는 상담 프로의 진행 방식은 사람들에게 상담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준다.
상담을 받으러 가면 ‘당신은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하는 사람을 종종 보는데,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신과 상담은 점장이들이 대신 하고 있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나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결과’를 들으러 가는 게 아니라 내가 많은 이야기를 하며 차곡차곡 상담 회차가 쌓일수록 상대방도 나에 대해 파악하고 나에게 적절한 의견을 주고 내 스스로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라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상담은 10회를 한 쿨(?)로 묶는 모양. 상담을 시작했으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싶더라도 10번은 꼭 채우길 권하고 싶다.
정신과인 경우는 ‘약 처방을 위주로 하는 곳’인지 ‘상담을 메인으로 하고 있는 곳’인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했다.
내가 맨 처음 갔던 곳은 그래도 나름 인터넷 후기가 괜찮아서 갔는데도 검사지로 검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네, 공황이네요.’ 하고는 자기 앞의 모니터를 내 쪽으로 삭 돌려서 화면에 약을 먹을 경우의 ‘부작용 리스트’를 보여주며 ‘약을 드실 건가요?’ 라고 건조하게 물어왔는데, 그 화면에 적혀 있는 오만가지 부작용을 보면서 ‘네, 약을 먹겠습니다’ 할 사람이 몇이나 될 련지…
그래서 그 날은 결국 공황이 올 때 바로 먹을 약만 받아왔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이 약이 내성이 있다는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했다. 심지어 ‘대수롭잖은 약이니 힘들 때 먹으면 된다’는 느낌으로 설명을 들었고 여름 한 철을 꼬박 고생하며 그나마 아주 심할 때만 한번씩 약을 먹었는데도 가을에 백신 맞기 전, 공황이 아주 정점을 찍었을 때 약 효과가 처음보다 못하다는 걸 체감했다.
그러고 갔던 (지금 다니고 있는) 병원의 선생님 첫마디가 ‘그 약만 먹으면 결국 약이 점점 뚱뚱해지죠'(점점 용량이 늘어난다는 말) 였다.
지금 다니는 병원은 선생님이 ‘상담’을 메인으로 하고 있고 본인 직업의 만족도가 높아 보여서 그 점에 나도 만족하며 다니는 중.
예약제인가 아닌가.
신체에 관련된 병은 추천하는 병원이나 의사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어렵지 않은데 정신과 관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상담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노출하기 꺼려하니 정말 정보가 없더라.
나는 모두닥 앱에서 근처 정신과 후기들을 훑었었는데(주변에 정신과가 이렇게 많았구나 새삼 놀랐고 후기가 전멸이라 또 놀랐다) 그 중에서 두 군데를 골라 첫번째 전화를 걸었던 곳은 일단 전화받는 사람의 첫마디가 “여보세요?”여서 당황했고(아니, 집전화 받냐고요…) 예약을 하려고 했더니 예약은 받지 않고 무조건 가서 대기해야 한다고 해서 포기.
그래서 두번째로 전화해서 예약한 곳에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데 예약제인가 아닌가는 내 이야기를 시간 제한 없이 들어주느냐, 정해진 시간 안에 들어주느냐의 차이라 어느 쪽이 옳고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개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고르면 될 듯.
상담을 받기 시작한 후 상담 프로를 보다보면 상황에 대한 어느 정도 ‘템플릿’이 있구나 라는 게 보일 때가 있다. 허리가 아플 때는 어떤 운동이 좋다든지 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그 말은 곧 티비에 나오는 명의가 아니어도 나와 맞으면 그 사람이 나에게는 오은영이 될 수도 있다.
상담은 신체적인 통증 때문에 가는 게 아니다보니 날이 궂거나 나가기 귀찮은 날이면 아무래도 꾀가 나기 쉬우니 가능하면 접근성이 좋은 곳을 추천.
심리 상담 경험 에세이.
요즘 부쩍 자신의 상담 경험에 대한 에세이 들이 늘어났고 나도 공황 관련 책은 한 권 사서 보고 주변에 공황이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도 했는데, 이런 책을 보고 나면 ‘내가 마치 치료를 받은’ 기분이 드는 것도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좀 위험했다.
그 책에서 얻어야 할 정보는 ‘병원을 가야 한다’와 ‘어떤 곳이 좋은 병원인가’ 였는데 남의 상담 내용에 나를 끼워맞추면서 마치 ‘병원을 안 가도 어느 정도 치료를 받은 기분’이 들었더랬다.
정신과든 상담이든 숨 못쉴 정도로 힘들어야 가는 곳이 아니었다.
나같은 경우는 말 그대로 결국 ‘숨을 못 쉴 정도’가 되어서 응급실을 찍고 그러고도 괜히 꺼려져서 반년을 미루다가 녹초가 되어 상담실 문턱을 기어 넘었는데 막상 상담을 시작하고 나니 진작에 내가 마음이 힘들 때 왔더라면 내 삶의 질이 훨씬 올라갔을 거라는 후회가 남는다.
상담해주는 사람이 나와 맞는가
사람과 사람이 긴 시간 대화를 해야 하니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새로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추천으로 갔어도 그 사람과 잘 맞는 사람이 나와는 안 맞을 수 있고, 이건 보통의 인간관계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니까.
나는 상담을 다니고 있다는 걸 주변에 많이 오픈하는 편인데, 그랬더니 다니는 곳에 대한 정보를 가져간 사람이 꽤 많았다.(애니동 대화방에서 나더러 그 병원 코디네이터냐고…)
내가 병원을 선뜻 알려주는 건 정신과에 대한 후기나 정보가 얼마나 적은지 겪어봐서고 알려주면서도 꼭 강조하는 건 ‘나는 맞았지만 당신은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상담을 몇 번 하다보면 다음 병원을 찾더라도 나에게 맞는 곳인지 아닌지 좀더 알기 쉬울 것 같다.
상담을 받기 전에는 ‘나와 비슷한’, 기혼의 유자녀인 사람이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준이 있었는데 지금의 선생님이 기혼인지 미혼인지,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건 전혀 상관이 없었고 상담해주는 사람의 공감력이 중요했다.
그리고 작년에 읽은 책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발견하고 내심 반가웠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걸어본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고 느낌으로써 비로소 그 고통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덜어낼 수 있다. 진심 어린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실제로 덜어준다. 심리 치료에서 가장 큰 치료 효과를 보이는 요인이 바로 치료자의 공감 능력이다.
나종호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p.119~120
제이콥의 치료를 담당했던 첫 번째 교수님은 제이콥 어머니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그녀는 어머니가 딱하다고 생각했고 아이를 키워본 엄마로서 그녀의 고통을 이해했다. 두 번째 교수님은 본인의 경험과 무관하게 제이콥 어머니의 경험을 듣고 싶어 했다. 그는 아이를 키워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궁금해했고 적극적으로 들어주며 그녀에게 공감했다. 그녀의 신발을 신고 걷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날 처음 깨달았다. 경험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음을.
꼭 책을 낼 목적이 아니더라도 그 날 상담 중에 내 머리에 오래 남거나 도움이 됐던 말은 다이어리나 메모장에 기록해두니 유용했다. 작년에 하루 날 잡고 상담 첫날부터 그때까지 적어놨던 걸 다이어리 앱에 날짜별로 정리해서 넣었는데 상담 초기의 내가 정말 ‘너갱이가 나갔었구나’ 가 적나라하게 보여서 씁쓸하면서도 그걸 덤덤히 볼 수 있는 지금에 감사했다.
현대사회는 가뜩이나 살기가 팍팍한데 판데믹을 겪으면서 한층 힘겨워져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상담이 필요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정신과’라는 게 인상이 좋지 않아 기피하다보니 오히려 사람들은 모두 화가 나 있고 날이 서 있는 게 아닐까.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