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라면서 어느 정도 변할까.
내 생각에 나는 그 변화의 폭이 엄청나게 커서 10대와 20대, 30대와 지금의 내가 (기본은 변하지 않겠지만) 꽤 많은 점에서 다르고, 아마 지금의 내 지인이 초등학교 5~6학년 때의 나를 만나서 이야기해본다면 그게 지금의 나라고 생각 못할 것 같다.
어제 상담 중에 선생님이 “어릴 때도 **하셨어요?”라고 물어본 게 있어서 그 질문에 갑자기 오랜만에 이 때가 생각나서 적어보기로.
초등학교 5학년 초에 지금의 동네로 전학을 왔는데 오자마자 국어 시간에 연극을 한다며 조를 짜게 되었다. 당시 교과서에 실린 작품은 ‘새로 나온 달님‘. (내용이 궁금한 분은 이곳으로)
임금과 공주, 총리와 왕실 마법사, 수학자와 광대가 나오는 작품이었는데, 선생님이 조를 짜줬는지 애들끼리 짰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찌저찌 어느 조에 들어가서 방과 후에 잠시 모여 각자 역할을 나눌 때가 오자 나는 과감히 공주를 자원했다.
같은 조원들이 다 순하고 착했던 것 같은데, 전학온 애가 하고 싶다고 하니 그랬는지 그냥 인심 좋게 ‘그래 그럼 그 역은 네가 해’ 뭐 이렇게 흘러갔던 듯.
그러고 나머지 역을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한 여자애가 ‘공주 역은 내가 하고 싶다!’고 뒤늦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아슴한 기억으로는 ‘자기 집에는 마침 공주 드레스가 있고 블라블라’ 뭐 이런 이유였는데 당시 나는 드레스가 (당연히) 없고…
그랬더니 다른 여자애가 ‘자기 집에 드레스가 있는데 얘한테 빌려줘도 된다’고 내 편을 들어주면서…
어이없게도 분위기가 험하게 흘러갔다.
지금 생각해도 내 심리를 나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갑자기 그 역을 꼭 하고 싶어졌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초등학교 5년 무리가 생각한 방법이 무엇이었느냐 하니.
누군가 어른을 찾아서 그 앞에서 대사를 읽어보고 연기력으로 결론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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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상황에 찾은 어른이 누구였냐 하니
학교 앞 부동산 아저씨.
놀랍게도 두 공주 지원자는 생판 처음 보는 부동산 아저씨 앞에서 실제로 연기를 펼쳤으며(그 아저씨 지금도 그 일 기억하시지 않을까….) 아저씨는 ‘조금 더 연기가 자연스러웠다’며 나를 지목했는데 그러고 나서 그 친구가 다른 조로 옮겼는지, 그 조가 반으로 쪼개졌는지 뒷일에 대한 기억은 가물하다.
지금의 나라면, 혹은 중고등학교 때 나였으면 아마 저 상황에서 승부욕 따위 없이 드레스 있다는 처자에게 양보하고 다음 역을 골랐을텐데 대체 내가 왜 저 역할을 하겠다고 부득부득 우겼는지도 이해를 못하겠고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서 연기를 할 변죽은 더더욱 저게 나였나 싶다.(만화나 애니라면 그 순간에 짠~ 하고 숨어있던 재능을 찾아내어 연기자로 들어서게 되는데~ 뭐 그런 스토리 라인도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은 없다.)
일단 다른 애들 먼저 역할 고르면 대충 끝날 때쯤 하나 잡아서 적당히 연극을 마치면 쌩유, 일 것 같은데 초등학교 5학년의 나는 참으로 열정적이기도 하지…
나의 성장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이면 저렇게 열정적인 성격으로 자란 나도 어딘가 평행세계에 존재하면 좋겠다.
내용이 가물해서 검색해보니 용케도 전문을 올려둔 곳이 있어서 오랜만에 다시 읽어봤는데 지금 고르라면 아마 광대를 골랐을 것 같다. (그 역은 그때도 별로 경쟁률이 치열하지 않았어) 다시 보니 그 역이 눈에 들어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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