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아무래도 북한의 작가라서 그렇게 많이 소개되는 편이 아니었고(요즘에는 교과서에도 많이 실려있는 모양) 나도 어쩌다 알게 된 몇몇 시들이 마음에 들어 관심이 있는 정도였는데 마침 얼마전에 시집 ‘사슴’도 샀고 비밀독서단을 보다가 백석을 사랑하는 작가가 직접 쓴 평전이 나와있다길래 이번에도 도서관에서 대출 완료.
할머니할아버지가있는 안간에들뫃
「여우난곬족」 중에서
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내음새가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내음새도나고
끼때의두부와 콩나물과 뽁운잔디와고사리와
도야지비게는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선굵은 외모에 완둣빛 더블버튼 양복을 쫙 빼입고 결벽증에 가까울만큼 깔끔지고 예민했으며 양말조차 가능하면 고급진 걸로 골라 신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그가 발표한 시들은 포스트모던하거나 현대적이어야 할 것 같은데 어울리지 않게(마치 잘 빼입은 정우성이 트로트 부르는 걸 보는 듯)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같은 시보다는 작가의 고향 평안도 사투리들이 그대로 살아있는 토속적이고 푸근한, 먹방 시라는 장르가 있다면 이 작품들이 아닐까 싶을 만큼 맛깔나는 음식 묘사가 두드러지는 시를 많이 남겼다.
월북작가라기보다는 ‘원래 북한에 살던 사람이라 굳이 남한으로 내려올 필요도 동기도 없어 남았다가 그쪽에서도 처지가 곤란해지고 결국에는 어느 쪽에서도 한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게 안됐고, 그 시절 대부분의 작가들에 비하면 차라리 작품활동을 잠시 접을 지언정 일본에는 협력하지 않았을만큼 결벽적인 지조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면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건 안타깝다.
생애에서 시인으로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딱 6-7년 정도였고 그 사이에 낸 작품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뛰어나서 지금의 백석에 대한 이미지는 그 몇년에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인데(그래서 마치 요절한 시인 같은 느낌이지만 정작 본인은 85세까지 꽤 장수하셨다) 시절이 좀더 받쳐줬다면 얼마나 괜찮은 시들이 더 나왔을까 아쉽기도…
백석에 대해 내가 막연하게 가진 정보는 당시 꽤 잘 생긴 모던보이였고 그 당시 그 족속들이 그러하듯 집안에서 권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도 자야 여사와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남긴 시인 정도였는데 이번에 이 평전을 읽다가 제일 깬 건 아무리 그 시절이 다 그랬다지만 부모가 권하는 여자랑 한 결혼만도 두 번이고 그 뒤로도 두 번이나 더 해서 결혼을 무려 네 번이나 했었더란. 작가의 시적 감수성 운운하기에는 저 사람 시 중에는 사랑 시도 별로 없잖아? -_-(이 부분에 대해서는 팬심 가득한 작가조차 쉴드를 못 치더라)
나라(奈良)에 오니 사슴이가 참 많소. 백(白)사슴을 보고 누구를 놀니고 싶었는지 알겠오?
아침에 시가로 나가 ‘사슴군’ 계신가고 학교로 전화를 걸었더니 벌서 일주일 전에 상경하셨다니 우리가 셋이서 싸단일 때 그는 어느 구석에서 망원경으로 다 살피지 않았으리오.
소설가 최정희, 시인 노천명, 모윤숙 등과 꽤 친하게 교류하며 지냈는데 그네들이 주고받은 서간을 보면 세 여자가 백석을 ‘사슴군’이라 부르며 가열차게 깠다가 농담을 했다가 하는 게 요즘 시절의 남자사람친구, 여자사람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인상적이었다.(그러게… 내 메신저 대화방에도 개구리도 있고 해파리도 있고 펭귄도 있고…) 이 평전 작가도 이야기했듯이 저들의 대화를 보고 나니 노천명의 ‘사슴’은 과연 그냥 ‘사슴’이었던 걸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다 읽고나니 작가의 시에 대해서는 좀더 풍부하게 알 수 있어 좋았고 작가에 대한 환상은 참 깔끔하게 깨진 책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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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