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지난번 ‘사소한 부탁’을 읽다가 마지막에 황현산 선생님이 “백석 평전은 안도현 작가 것이, 윤동주 평전은 송우혜 작가 것이 제일”이라고 해서 문득 생각해보니 윤동주는 시만 읽었지 제대로 일생에 대해 알아본 적이 없어서(영화 ‘동주’도 안 봤음) 궁금해졌다.

우선 이 책은 자료면에서는 그야말로 윤동주 인생에 대한 완전판이라는 말이 맞았다.
윤동주의 고향인 북간도의 지역적인 특색부터 시작해서 북쪽 지역의 관점에서 겪은 당시 국내외 상황 설명, 그의 인생 요소요소에 일어난 사건과 그의 시를 함께 분석해서 우리가 교과서에서 밑줄 그으며 배운 해설과 실제 시인의 의도가 틀릴 수도 있다는 점들을 짚은 건 새로웠고 막연하게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감수성 풍부하고 결벽한 청년의 이미지로만 생각되던 시인이 실제로는 자신보다 뛰어난 고종사촌 송몽규와 평생 한 집안에서 자라며 나란히 경쟁하고 괴로워했는데 그 모습이 어찌보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실제 윤동주가 옥사까지 하게 되는 데에는 이 송몽규가 이미 요주인물로 일본 정부에 찍혀 있어서 같이 얽혀 들어간 면도 크고 윤동주 인생에 송몽규라는 사람을 넣지 않고는 제대로 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을 정도인데 우리는 보통 윤동주 위주의 단편적인 이야기만 듣게 되는 것 같다.

지난번 ‘변월룡’ 때도 그랬지만 그 당시 다른 나라와 국경을 맞닿은 북쪽의 끝자락에 살던 사람들이 남쪽 사람들보다 훨씬 민감하게 겪을 수밖에 없는 국제 정세의 불안정함이라든지 지역적인 특색에 대한 조사도 이 책의 특징이자 장점일 듯.

이러한 육진 문화에서 매우 특징적인 것이 언어문화였다. 그들은 세종조 당시의 어음(語音)을 한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하며 실생활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아마도 세종 때에 육진에 옮겨진 후로 다른 지방과 별 내왕이 없이 폐쇄적으로 살아온 까닭이리라.

그리고 늘 그렇지만 마지막에 시인이 투옥되고 최후를 맞이하는 상황은 알고 읽어도 슬프고 애잔하다.

그런데 장례가 지난 얼마 후요, 동주 어머니가 집안의 빨랫거리들을 챙기고 있다가 동주의 흰 와이셔츠가 나오자 더 이상 견디지 못했지. 그만 통곡이 터져나온 거야. 목을 놓아 통곡하고 또 통곡하고, 마냥 그치지를 못했어.

한 마디로, 윤동주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한 권이면 된다는 말에는 별 이의가 없다.

그러나 책의 완성도 면에서는 여러모로 아쉬웠는데, 단적으로 다 읽고 나니 지난번 안도현 작가의 백석 평전이 얼마나 ‘잘 쓴’ 평전인지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_-;
방대한 자료를 충분히 소화해서 글로 풀어냈다기보다는 모은 자료 사이사이에 작가의 감정적인 표현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흐름을 방해하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3차 개정판까지 낸 책이 일본 지명과 일본인 표기가 뜬금없이 한국식 한자 표기라서 윤동주가 일본으로 유학가는 시점부터는 지명이고 인물이고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일본 어디 지역인지 한눈에 들어오지가 않아 읽는 데에 최악이었다.(이런 일본 표기는 나 어릴 때 우리집에 있던 세로읽기 전집 같은 데서나 봤던 거 같은데)

“일본인 여성 양원태자 씨는…”
“이취향 씨는 윤동주가 살았던 아파트 자리와…”
이라든지
“윤동주가 경도에서 살았던 곳은 좌경구 전중고원정 27, 무전 아파트”

라는 식.(그러다가 또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빌려올 때는 일본식으로 표기하고 있다.)
작가가 당시 윤동주와 관련 있었던 사람들을 책을 쓰기 위해 만나 인터뷰한 사항들을 자기 글로 인용하기 시작하면 이 사람이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한국에서 있었던 일인지 일본에서 있었던 일인지 그야말로 대혼란.
내가 빌린 도서관 책이 2016년 발행된 책인데 적어도 국내 윤동주 평전 중 대표작이라는 책이 그 사이에 세 번이나 개정판을 냈으면 적어도 이런 건 손봤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ps. 앞에 읽었던 평전들이 백석과 변월룡이라 그런가, 이번 책을 다 읽고 나니 윤동주가 그 당시에 옥사하지 않고 계속 살아서 해방을 맞아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더라면 북쪽에 고향과 가족을 둔 그가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 우리에게는 앞의 두 사람처럼 뒤늦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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