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각박하다 해도…

며칠 전에 근처 사는 친구가 우리 집에 들렀다가 저녁때쯤 돌아가기 위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더랬습니다.
밖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길이라 김에 버스가 올 때까지 저도 같이 기다렸는데 마침 운좋게 제일 앞에 줄을 설 수 있었지요. 퇴근시간대라서 사람이 꽤 붐빌텐데 친구가 유모차까지 끌고 있어서 자리 잡기 편하니 잘됐다 하고 둘이 이야기를 나누다 버스가 도착하고 유모차를 막 버스에 올리려던 순간, 친구가 유모차에 걸어뒀던 종이백 옆구리가 후두둑 튿어지며 안에 들어있던 이런저런 내용물이 다 쏟아져내린 겁니다.
당황해서 둘이 서둘러 옆으로 비켜내려와서 정신없이 물건을 다른 봉지들에 나눠 담고 저는 일단 줄 서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들 타시라’고 하고 함께 물건을 챙기고 있는데…

문득 이상해서 다시 보니 뒤에 서있던 사람들이 아무도 먼저 안 타고 기다리고 있더군요. 게다가 별로 짜증나거나 기분 나쁜 기색도 전혀 없이 말이지요. 잠시 후에 버스 기사가 내려와서 괜찮느냐고 묻길래 다른 분들 먼저 타시라고 이야기를 하니 ‘지금 손님이 많은 시간대라서 나중에 타면 자리를 잡기가 힘들다, 다 챙기고 올라오시라’고 하더군요. 그러는 동안 대충 상황은 정리되고 친구는 유모차를 실고 맨 처음으로 버스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친구 말이 내릴 때도 자기가 내려서 짐들 다 챙길 때까지 버스 기사가 버스 출발도 안 시키고 보고 있다가 친구가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가더라고 하네요.

얼마 전에 이 인근에서도 길 가다가 칼에 찔린 여자가 있었다든지 일본 지하철 안에서 여자가 성폭행을 당하는 동안 승객들이 모두 외면했다든지 이런저런 뉴스들이 시끄럽지만 그래도 가끔 이런 배려를 보고 나면 그래도 나쁜 사람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에서 살아서 어떤 게 더 좋다거나 여기 물건이 더 좋다, 그런 류의 이야기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만 주변에 아기 키우는 친구들이 늘어나면서 유모차를 가지고 다니는 주부들에 대한 배려는 확실히 눈에 띕니다.
유모차를 가지고 버스에 오를 때 기사가 와서 직접 좌석에 유모차를 벨트로 고정시켜주고 내릴 때도 와서 직접 풀어주고 받아가는 걸 보면 버스비가 비싸도 비싼 값은 한다 싶더라구요. 한국도 요즘 차비가 엄청나게 오르는 듯하던데 오르는 만큼 서비스도 함께 올라줬으면 좋겠습니다. -_-;

Ritsko Avatar

Published by

Categories:
  1. lazydog Avatar
    lazydog

    아. 택시비 아껴서 유모차 매고 애 둘 데리고 마을버스 타고 잘 댕기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둘을 데리고 서울까지 나가 유진이 병원에 코엑스에 강남 신세계까지 종횡무진 다니고 있지요. 근데 확실히 배려 받지는 못한답니다. 지하철도 리프트 시설이 완벽한게 아니라서 종종 계단에 (아이 태운 채로) 유모차를 들고 올라갈 때가 있는데 그럴때 어떤 사람들은 치고 지나가도 미안하단 말 안할때도 있어요. 사실 유모차 안들어 줘도 되니까 큰 아이가 올라가는 걸 잘 살펴만 줘도 고마울텐데. 그래도 열에 한번은 적극적으로 이런 저런 배려를 해 주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참 고맙지요.
    기다려 줬다는 버스 기사분 정말 대단하네요. 여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출발을 기다기리만 해도 훌룡한 거랍니다.

    1. 리츠코 Avatar
      리츠코

      저는 일본 지하철은 엘리베이터가 꽤 잘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도 선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더군요. 유모차를 가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일본이든 한국이든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보통 일이 아니예요..;

  2. Tom Avatar
    Tom

    엄마들이 유모차를 갖고 버스를 오르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몇몇 버스 기사들의 눈빛을 마주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아이들과 외출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어떻게든 데리러 가려고 하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 다만 말에 그칠지라도 – 택시비 아끼지 말라고 하게 된다. (웃기는 건, 치르는 값에 비하면 택시라고 해서 편한 것도 아니라는..) 한국은 도대체 아이를 키울 생각이 있는 나라인가 싶어.

    1. 리츠코 Avatar
      리츠코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버스를 탈 때 유모차를 갖고 타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지하철에서도 길에서도 흔치 않았고… 여기는 어딜 가도 유모차군단(?)이 점령하고 있을 정도인데 한국의 엄마들은 모두 안고 다니거나 자가용을 몰아야 한다는 건지…
      택시비는 여기가 워낙 비싸기 때문에 한국 택시비 정도라면… 이라고 생각하게 됐음..-.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