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에 뒀더니 옆사람도 린양도 제목을 보고 피식 웃었지만 내용은 차마 웃을 수 없는 이야기.
내 나이 15살, 서서히 앞을 보지 못할 거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엄마는 용하다는 무당이며 스님을 찾아다녔고 신비의 영약이라는 물도 찾아다녔지만 결국 시력을 잃고 말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과 동시에 매일 슬픔 속에서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무나 먹먹한 상황이라 읽으면서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작 슬픔보다 작가가 겪는 상처들이 너무 아프게 다가와서, 글은 술술 읽히는데 두어 챕터 읽고 나니 도저히 더 붙잡을 여력이 없어 한동안 내려뒀다 다시 잡았다.
관광지에서 마주친 한국인 할머니들이 걱정을 담아 우리에게 건넨 말은 이렇다.
“앞도 못 보면서 여기 힘들게 뭐하러 왔누!”
보이지 않아도 보고 싶은 욕망은 있다.
들리지 않아도 듣고 싶은 소망이 있다.
걸을 수 없어도 뛰고 싶은 마음은 들 수 있다.
모든 이들은 행복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p.39
장애인의 삶은, 장애로 인한 불편보다 주변이 주는 상처에서 받는 피로감이 더 커 보였다. 세상은 왜 좀더 다정하지 못할까. 혹시 나는 무심코 실수한 적이 없었는지 다시 한번 머리에 바짝 힘주게 된다.
오래전 지인을 따라 방문한 어느 교회에서 목사는 나의 장애를 거론하며 말했다.
“하나님이 왜 장애인을 이 땅에 만드셨는지 아시나요? 그건 여러분께 현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해드리려는 주님의 안배입니다. 저들을 바라보며 건강한 육신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아시길 바랍니다.”
강단 아래 100여 명의 신도들은 모두 “아멘” 하고 대답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그날의 치욕을 잊지 못한다. 어느새 들이친 죄책감이 발목까지 고여들었다.
-p.187
(저딴 개소리를 하는 인간이나 거기에 ‘아멘’하는 인간들이나…)
책 초반을 읽으며 덩달아 의기소침해졌다가 뒤로 갈수록 함께 화내기도 하고 이미 겪을 만큼 겪은 작가의 관조하는 태도에 오히려 내가 위안을 삼기도 하며 단숨에 읽어내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그녀는 책의 제목처럼 세상의 지랄맞음을 모아 자신 나름의 축제를 만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것을 넘어서 하고 싶은 걸 어떻게든 해내며 즐겁게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그녀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마친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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