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기 10월 11일

혹시나 진통이 오지 않을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밤을 보내고 아침이 밝았습니다. 양수도 여전히 더 이상 새지 않았고 오전에 내진을 한 결과 태아도 아직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고 자궁 입구도 전혀 열리지 않은 상태라더군요. 그리고 분만촉진제 투여가 시작됐지요.

많이 걸으면 진통도 잘 온다고 하여 배에는 기계를 붙인 채 덜그럭거리면서 병원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복도를 왔다리갔다리 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이 병원이 워낙 건물이 작아서(…) 운동하기 정말 어렵더군요. -_-;
정말 이맘때 단체로 진통이 안 걸리는 살이라도 꼈는지 어제부터 같이 있던 옆침대의 산모도, 옆방에 있는 산모도 모두 진통을 기다리느라 애가 탑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들리는 말은 ‘땡기기는 하는데 아프지는 않아요'(…)

별다른 조짐도 없이 좀 걸으면 배가 땡겼다가 쉬면 다시 멀쩡해지는 상태를 반복하며 반나절을 보냈습니다. 양수도 여전히 더 이상 새지 않고 있고요.
간호사가 처음에 했던 말이 ‘출산이라는 게 산모, 태아, 자궁의 상태가 모두 균형이 맞을 때 시작되는 거예요’ 라더니 저는 이 세가지가 전부 제각각인 상태가 아닌가 싶더군요. 저나 태아나 출산 준비가 안됐는데 자궁의 상태만 출산 준비중이었나봅니다.
엄마는 대나무숲 출장 날짜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그런게 아니냐고 하시는데 저랑 대나무숲은 혜린이가 뱃속에서 격렬하게 갈비뼈쪽을 걷어차던 중에 샌 게 아닐까 뭐 그런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그날 오후 5시쯤 내진을 받으러 갔는데 상태를 본 의사(이쪽은 나중에 알고보니 부원장이었더군요)가 거의 한숨을 내쉬며 ‘전혀 진행된 게 없네요’ 라고 하더니 그 다음에 정말 귀를 의심(혹은 내가 일본어를 잘못 알아들은 건가 싶은)하고 싶은 말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샌 것이 정말 양수가 맞는지 검사 키트로 확인을 해봐야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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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럼 그것도 없이 지금까지 생쇼를 한 겁니까아아아.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지금까지의 상황들.
출장을 취소하고 서울 집에서는 부랴부랴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난리가 엎어졌는데 이제와서 아무 일 없이 집에 돌아가 다시 진통이 올 때까지 ‘상황종료’일 수도 있다니 정말 황망하더군요…; 남의 속도 모르고 옆에서 간호사는 ‘양수가 아니었으면 좋을텐데요’ 라고 하더이다.
의사에게 ‘직접 신랑에게 한번 더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해둔 후 일단 병실로 돌아와서 대나무숲에게 간략히 상황을 설명하자 역시나 ‘뎅~’하는 표정. 둘이 머리 맞대고 앉아서 부원장을 기다린 30분이 정말 30시간 같았습니다. 만약 양수가 아니라면 분명히 오진이니 이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둘이 단단히 다짐을 하고 있는데 부원장이 검사했던 키트를 아예 들고 들어오더군요. 그리고 만면에 화색이 도는 얼굴로(아까 확인을 해봐야겠다고 할 때 표정은 그쪽도 심히 어두웠던 듯) ‘역시 양수가 맞네요’ 라며 키트를 아예 보여주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상황은 보통 양수가 터진 부분이 아래쪽일 경우 한번에 파수가 되는데 저같은 경우는 더 이상 새지 않는 걸로 봐서 위쪽이 약간 터지면서 저절로 내장과 근육에 막힌 상태가 아닌가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행히 양수 오염도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고 수치상으로 봤을 때 ‘전혀 진행이 안되는 상황’은 아니라는 겁니다.
아침부터 분만촉진제를 놓고 있는데 아무 진행도 안되었다는 건(자궁 입구는 겨우 2센티 열렸고 애 위치는 무려 외래 환자들 진찰할 때 정도라더군요) 이대로 밤까지 계속 양을 늘려본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으니 일단 그날 밤은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걸 우선으로 한 후 48시간째가 되는 다음날 7시를 기준으로 좀더 오전중에 분만촉진제를 투여해보고 그 이후로는 수술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더군요.

그날 낮에 제 담당이었던 원장 선생님의 의견은 밤새 분만촉진제로 진행을 시켜보자, 였는데 아까 내진을 하면서 부원장과 뭔가 계속 전화로 의논을 하는 듯하더니 부원장 쪽 의견으로 방향이 바뀐 듯했습니다. 하긴 당췌 아무것도 진행이 안되고 있으니 별 수가 없기도 하지요. -_-;

원장 선생님의 경우는 양수 상태도 좋고 해서 48시간이 지나더라도 원한다면 좀더 진통을 기다려보자는 의견이긴 했습니다만 대나무숲과 저도 아무래도 양수 오염이라든지 이런저런 위험 때문에 그 이상을 더 무작정 기다리는 건 불안하더라구요. 막판의 원장 선생님 의견처럼 ‘아이가 건강할 때’ 무사히 나오는 게 중요하지 뭔가 비상사태가 생겨서 급하게 ‘나와야 하는’ 건 의미가 없기도 하고요.
다음날 오전에 원장 선생님이 오면 우리 의견을 전달하기로 하고 일단 분만촉진제를 중단한 후 그렇게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Ritsko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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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루카 Avatar
    하루카

    으하하^^ 저와 비슷한 상황이네요.
    30시간 같았다..이해되요 ㅠㅠ
    진통이 되자 신랑에게 어서 오라고 불렀는데..
    진통도 멈춰버리고;;
    뱃속에 아기에게 “오늘 5시까지는 나와줘 제발~~ 안그럼 아빠가
    비행기 타고 간단다~” 외쳤던..
    다행히 하늘이 도와줬지요^^

    1. 리츠코 Avatar
      리츠코

      진통이라는 게 생각보다 참 안 걸리더군요. 제가 입원했던 날은 정말 무슨 단체로 짠 것처럼 다들 분만촉진제가 실패해서 한명은 집으로 귀가, 한명은 제가 수술한 날 오후에 수술하더라구요. -_-;
      그래도 채운이는 아빠 가기 전에 나와줬으니 효도했어요.

  2. CHRIS Avatar
    CHRIS

    사무실에서 비행기 티켓 끊느라 생쑈한 거 생각하면…-_-;; (그날 차장님이 출장가서 안계셨기에 망정이지) 나까정 오싹해지는구먼. 어쨌거나 포지티브 씽킹구. 건강하게 잘 나와주어 다행이야.

    1. 리츠코 Avatar
      리츠코

      저 난리를 쳤는데 다시 집에 가는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병원 침대 엎고 싶더라니까.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