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어제 저녁에 대부분의 집안 일을 끝내고 자러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세척이 끝난 식기 세척기 안의 그릇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지 않았다.

하루의 끝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새 날을 맞은 기분.

요즘은 세탁기도 건조기도 로봇청소기도 모두 앱으로 종료 알림을 보내는데 그 알림을 보고도 지나쳤다가 그대로 잊어버리면 세탁물이 세탁기 안에서 젖은 채로, 혹은 다 마른 빨래가 건조기 안에서 주름진 채로 방치되고 때맞춰 물걸레청소기를 돌리지 않으면 로봇 청소기는 물걸레 청소기와 격투를 벌이게 되며 식기세척기 안의 그릇들을 제때 정리해넣지 않으면 순식간에 식기세척기는 식기건조대가 되어버린다.(…)

세탁기를 돌리면 빨래가 끝났다는 알림음에 맞춰 꺼내서 건조기로 올린 후 건조기로 말린 옷은 꺼내서 정리해야 하고, 운동한 후 씻으러 들어가기 전에 청소기를 돌려놓고 씻고 나와서 물걸레 청소기를 출발(?)시킨다.

집안 일을 기계가 다 해주는 것 같지만 접시가 발이 달려서 식기건조대로 직접 걸어가거나 빨래가 젖은 몸을 이끌고 건조기로 이동한 후 건조가 끝나면 알아서 탈출해 스스로 곱게 몸을 접지 않는 다음에야 마무리에는 모두 사람의 손이 필요한 법.

여기에 더해 요며칠 유난히 집안에 비품이 떨어진 게 많아서 이것저것 주문을 넣다보니 문득 작은 톱니들로 이루어진 집안일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안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직업이 전업 주부다보니 가족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는 가능한 한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고 싶은데 집안 일이란 참으로 해도 티가 안 나고 안 하면 티가 나서 평범하게 안락한 하루를 보내기 위한 이면에는 잔손 가는 일들이 가득하고 톱니의 한 끗만 어긋나도 빈틈이 생겨 덜커덩거린다.

오늘은 잊지 않고 세척기까지 정리 끝내고 부엌 마감 후 끄적여보는 글.
이 시간부터는 나도 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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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sponses

  1. 디멘티토

    전 평일에는 엄마가 해주시고 주말에만 제가 집안일을 하는데(그나마도 서울 동생집에 가면 땡땡이)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분주하더라고요. 따져보면 오전에 세 시간 정도를 집안일에 투자하는 셈인데 말이 세 시간이지 신경 쓰고 어쩌다 보면 오후가 되어서야 짬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걸 매일 해야한다고 생각하면 버겁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열심히 쓸고 닦아도 티 안 나지만 안 하면 티가 난다는 말씀 백 번 공감합니다.

    1. Ritz

      해도 티가 안 날 거면 안 해도 티가 안 나야 공평하지 않나 싶은데 말이죠. ^^;

      세탁기를 돌리면 돌아가는 시간, 청소기 돌아가는 시간. 이렇게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흘러가는 시간이 때문에 하루 할 일을 몰아서 짧은 시간 안에 딱 끝내기가 어렵고 그래서 하루종일 뭔가 한 것 같은데 뭔가 한 것 같지 않은, 그런 게 집안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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