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먹는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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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책을 선물 받았다.

책을 좋아하는 걸 아는 주변에서 가끔 선물하는 경우가 있긴 한데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라 선물한 분이 왜 이 책을 읽고 내 생각을 해주셨을까, 책장을 펴기 전부터 많이 궁금했다.

작가인 미즈카미 츠토무(1919~2004)는 일본의 소설가, 전기작가, 희곡작가로 대표작은 <기러기의 절>, <에치젠의 대나무 인형> 등이 있으며 <기러기의 절>로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이 책 <흙을 먹는 나날>은 의외로 <맛의 달인>에 나온 적 있다는데 주인공 지로가 ‘지금, 유일하게 읽을 가치가 있는 음식 책’이라고 극찬했다고. 1978년 초판이 발행된 이후로 누계 판매량이 27만부(삼끼님 정보 감사).

작가에 대해 찾아보니 집안 형편이 워낙 어려워 아홉살에 교토의 선종 사원에 맡겨져 생활하며 자연스럽게 사찰 음식을 배웠고 절에서 나온 후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40여년간 36번 직업을 바꿨다고) 작가로 성공한 후 가루이자와의 산장에 살며 직접 농사짓고 어린 시절에 배웠던 요리들을 기억하며 쓴, 1년 12달의 자연과 요리에 대한 글을 모은 에세이집이었다.

보내주신 분이 내가 요즘 워낙 심적으로 둘 곳을 모르고 있는 걸 알고 보내주셨는지 덕분에 한 달, 한 챕터를 읽어 나가는 동안 참으로 평온한 시간이었다. 이 급한 성격에도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탐닉하기보다 한 달 또 한 달 틈이 날 때마다 손에 잡는 즐거움이 있었던 한 권.
책에 등장하는 다소 낯선 요리와 재료들도 열심히 그 맛을 짐작해봤다.

음식에 대한 에세이지만 그 맛의 향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재료로 음식을 만들기까지의 수고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런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 돌이켜보고 이 음식들은 내 몸을 유지하게 해주는 약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의도라, 그래서 1978년에 나온 책이 2025년인 지금 읽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나보다.(1978년에 나온 건 다 읽고 나서 찾아보고서야 알았다)

자연에서 구한 재료를 조금도 낭비하지 않게 가능하면 껍질도 얇게 깎고 가진 그대로의 향과 풍미를 최선을 다해 즐기자는 이야기에, 귀찮아서 시금치 뿌리 부분을 대충 처리해버리는 사람으로서 잠시 반성하며. 😅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문장은,

겨울이 쓸쓸하다고 한 것은 흙도 잠들기 때문이다.
─p.224

올 겨울에 화분에 물을 주면서 가끔 느꼈던 게 무엇이었는지, 이 한 문장을 읽으며 깨달았다. 제아무리 따뜻한 실내에 둔 화분도 신기하게 다른 계절만큼 ‘자라고 있지’ 않다. 화분의 물마름도 빠르지 않을 뿐더러 물을 준다는 행위도 식물을 ‘연명’시켜주는 기분이 든다. 이 계절에는 흙이 잠드는가 보다. 자라지 않는다고 안달하지 말고 나도 봄을 차분히 기다려야겠다.

9 responses

  1. March Hare

    원서로 사삭 읽고있는 중입니다.
    찾아보니까 누계 1억원 이상 판매된 것은 맛의 달인 쪽이고
    이 책은 2022년에 중쇄 결정하면서 누계 27만부 돌파했다는 기사가 있더라구요. 그리고 그 해 말에 영화화도 되었다고.
    어쨌든 덕분에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원래 요리 에세이는 좋아하는편이지만 이건 식물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니까 더 그럴까요.

    1. Ritsko

      앗, 그렇군요. 위키피디아에 있는 걸 대충 번역기 돌렸더니 이런…-_-;
      영화화할 만한 내용이 있나 싶은데 생각해보니 일본은 저런 분위기는 또 잘 만들었을 것 같기도 하네요. 마음에 드셨다니 저도 기뻐요. 🙂

  2. 포멜로

    저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써주신 구절도 마음에 깊이 와닿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1. Ritsko

      무라카미 하루키가 30년 전에 쓴 에세이를 최근에 읽은 적이 있는데 너무 낡은 느낌이라 놀랐었는데 이 책은 다 읽을 때까지 그렇게 오래 전에 썼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래서 스테디셀러겠지만요. 🙂 1919년생인 작가가 1978년에 쓴 이야기라 간간히 세월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저는 참 좋았더랬어요.

  3. ‪무기농 무도사‬

    그… 그치만 리츠님 시금치 뿌리는….. 다들 버릴거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뿌리 없는 걸 사는 사람)

    1. Ritsko

      아, 이 책에서 그 시금치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
      글을 읽으면서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는데 그럼에도 저는 뿌리를 버릴 사람… ^^;;;

      “언젠가 내가 부엌 한 구석에 대충 잘라서 버린 시금치 뿌리를 노스님에게 들킨 일이 있었다. 노스님은 잠자코 그것을 주워 모으며 “잘 씻어서 나물에 넣거라” 하셨다. 나는 얼굴이 화끈했다.
      (중략)
      노스님은 내게 그때 시금치의 불그스름한 뿌리도 나물에 함께 넣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대로 했다. 그러자 잎의 부드러운 초록빛이 도는 부분에 붉은 뿌리가 꽃처럼 뿌려져 화려해졌고 혀 위에서는 뿌리가 달콤함을 더했다. 그렇다고 또 뿌리만 있으면 그 또한 가치가 없다. 파릇한 부분에 뒤섞여 있기에 달콤한 맛과 색이 발휘된다.”

      1. 무기농 무도사‬

        오…. 저 구절을 읽으니… 알겠… 지만 역시 현대인의 삶이란…. 뿌리를 버리겠죠… 으히히히히히히히히히

        1. Ritsko

          그죠. 그것이 현대의 삶…( ”)

          1. 무기농 무도사

            후후후후 저도 저 책이 궁금해졌어요 잘 찾아보갰읍니다 +_+

            (제 책장 보다 남의 책장이 재미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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