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연휴가 지나고 A님 댁에 놀러가니 못보던 시추가 한 마리 있다.
유난히 폭우가 많이 내린 올여름 어느 날인가, A님 동생이 차를 몰고 복정역을 지나가다가 비를 흠뻑맞고 있는 개 한마리를 보고 그냥 지나쳤다가 도저히 눈에 밟혀 도로 돌아가 집에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더랬는데, 그 개는 A님의 지인분 댁으로 분양을 갔다가 그 분양 간 집의 원래 키우던 개들이 새로 온 이 시추에게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바람에 주인이 곤란해해서 다시 집을 찾아주기 위해 일단 데리고 오셨단다.
복정역에서 만나서 이름은 복정이.(이 이름 묘하게 입에 짝 붙는다..;)

놀러가기 전 잠깐 메신저로 이야기하기로는 배변훈련도 잘 되어있고 짖지도 않고 얌전하다길래 누군가 잃어버린 개가 아닐까, 요즘 자주 올라오듯이 애견연예인에게 트윗으로 RT라도 부탁해야하는걸까 머리를 굴렸더랬는데 막상 직접 가서 보니 이 개 성격 자체가 정말로 너무 조용해서 베란다 문을 열어줘도 주인을 보고 허락을 구하는 듯한 제스쳐를 보여, 도무지 어느 집에서 뛰쳐나와 길을 잃었을 것 같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여섯살쯤 되었을 거라고 했다는데, 시추는 어릴 때는 무지 귀여우나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예쁜 맛이 없어 버려지는 일이 종종 있다고.

A님 댁에 있는 내내 이 복정이는 도무지 집에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짖지도 않아서 A님도 처음에는 성대수술을 시킨 개인가 싶으셨다고.
먹을 걸 좋아하는지 사람이 뭘 먹는 것만 보면 빤~히 쳐다보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식탁 아래에서 조용히 누워 보냈다.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저렇게 얌전히 앉아 빤히 쳐다보는데, 전 주인이 사진을 많이 찍어줬던 걸까.

지금까지 유기견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냥 ‘그런 일도 있는가보다’ 정도의 감상이었는데 막상 정말로 내 눈앞에 누군가의 손길로 잘 지냈던 개가 집을 잃고 갈곳을 찾는 모습을 보니, 그리고 이 개가 혹 유기견 보호소라도 가게 되면 일정 시간이 지나 세상을 등져야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마음이 무겁다.

복정이가 유기견인지, 아니면 지금 누군가 찾고 있는 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정말 누군가가 사정이 있어 버린 개라면 그렇게 시간을 함께 보낸 생물을 내치는 사람의 마음이 참 무섭지 않은가.

그래도 폭우 속에서 홀딱 젖은 개를 차에 싣고 뒷좌석을 물범벅을 해가며 집에 데려와 필요한 주사까지 다 맞힌 A님 동생이나 유기견 입양해서 학대하는 사람이 많다며 걱정하는 마음에 멀리 살아도 지인 중에 새 집을 찾아주고 싶다는 마음 고운 A님을 만난 것을 보면 이 복정이의 운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운이 끝까지 약발을 받아 부디 좋은 주인을 찾아 남은 시간을 잘 보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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