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초등학교 때 읽었던 전집에서 좋아했던 작품 중 하나가 복간(?)되어 나와 있길래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원제는 진열장 속의 들고양이(Wildcat Under Glass. Το Καπλάνι της Βιτρίνας. 1963)
지금은 ‘니코 오빠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판 중인데 ‘알키 자이’라고 알고 있었던 작가 이름은 ‘알키 지’라고 읽는 모양이다.(영문 표기는 Alki Zei던데 자이에 더 가깝지 않나…)

신화 세계 이후로 나는 잘 알지 못하는 현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주인공 멜리사와 그녀의 가족들—독재에 반대하는 ‘자유의 투사’인 사촌오빠 니코, 왕정주의자인 대고모, 민주화를 지지하는 할아버지, 학교 청소년 연맹의 단장이 되기 위해 본의아니게 독재정권에 협조하며 가족을 위기로 몰아넣게 되는 언니 미르토 등—이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는 내용인데 어린 시절에 읽으면서도 ‘운동권 오빠가 잡혀갈까봐 도망다니는 이야기라니 이 나라도 우리나라랑 비슷한가’ 했었다.

요즘에야 세상이 편해져서 몇번 검색만 하면 금방이니 어릴 때 궁금했던 몇 가지를 찾아보니

우선 이 작품의 배경인 1936년 8월 전후.
파시즘이 그리스까지 세력을 미쳐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8월 4일 즈음하여 독재를 시작했다고 하니 이 책에 나오는 ‘두꺼비 같이 생긴 독재자’는 바로 이 사람일텐데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1941년까지 정권은 이어졌고 그리스는 2차대전의 소용돌이 안에서 국가가 3등분이 되었다가 다시 합쳐지는 등 대혼란을 겪는다.
나에게 그리스란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수식어가 가장 익숙한데 정작 현대 그리스에 제대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건 21세기에나 들어선 후인 모양이니 아이러니하기도.

우리 사촌 아가씨들에게.
나는 들고양이를 타고 스페인으로 간다.
내가 너희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겠지. 거기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단다. 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편에서 싸울 것이다.
내가 돌아오는 날 우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라마가리에 다시 가자. 나는 들고양이와 내가 겪은 신기한 모험 이야기를 너희들에게 들려주게 되겠지.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이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우리는 우리나라에도 민주주의가 오도록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들고양이의 두 눈은 모두 밝고 푸른 하늘빛이 되겠지. 마놀리도 학교에 가게 되고 그래서 음악가가 되는 거다.
잊지 말아라! 라마가리의 친구들을 항상 사랑하는 일을!
그럼 잘 있거라, 안녕!
건강하게 지내기 바란다!

(지금 읽으니 무슨 유서 같아. ㅠ.ㅠ)

독재 정치가 시작됐으면 그리스 안에서 저항운동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니코 오빠가 계속 스페인으로 간다고 해서 대체 왜 ‘스페인’으로 가는 건가 찾아보니.
이 즈음에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장군이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도움을 받아 독재 정권을 세우려했고 스페인 안에서는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세력을 모아 엄청난 내전이 일어나 주변 국가에서도 뜻을 모으는 사람들이 동참했었는데 그리스 사람들도 도와주러 많이 이동했던 모양.

어린 마음에 들고양이의 등에 타고 스페인으로 간 니코 오빠는 언젠가 다시 돌아와 멜리사의 가족들과 평화로운 세상을 맞이하겠지 믿었는데 이 나이에 다시 읽고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니코 오빠는 스페인까지 무사히 도착해 내전에 뛰어들었어도 무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고(당시 니코 오빠가 참전했을 인민전선이 프랑코 장군에게 패배했음…) 멜리사의 가족도 가족 구성원의 사상적인 문제로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다. -_-;

이 작품에서는 멜리사의 언니 미르토가 제대로 의미도 모르고 단복과 어른들의 부추김에 혹해서 파시스트 청소년 연맹에 가입하고 단장이 되기 위해 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나중에 큰 사건을 겪으면서 거기에서 벗어나게 되는 흐름이 백미. 초등학생 연령대 작품 중에 이 정도로 세련되게 ‘정치’에 대해 풀어가는 작품도 아마 드물 것 같다.

알키 지는 찾아보니 1925년생, 무려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작가로 본인이 그리스의 정치 상황 때문에 1954~1964년까지 정치적인 망명자로 소련에서 지내다가 이후 가족과 함께 그리스로 돌아왔으며 67년 다시 독재정권이 시작되면서 파리로 옮겨 생활하다가 독재정권이 무너진 후 다시 그리스로 돌아갔다고.
이 작품은 본인이 사모스 섬에서 지낸 어린 시절을 모티브로 쓴 반 자서전에 가깝다고 하니 아마 이 책의 멜리사의 이후 이야기도 대충 이렇지 않을까.

내가 궁금해서 빌린 책이라 나만 읽고 반납하려고 했는데 다시 읽어봐도 수작이라 린양에게 패스할 예정.

by

/

6 responses

  1. 아 이 책 어릴 때 정말 좋아했던 책이었어요!! (어릴 때 창비아동문고 전집을 한권 두권 사모았었기에) 그땐 정치적 상황이나 이런 건 전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이야기 자체에 푹 빠져 읽었더랬는데…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전 이 책을 읽은 이후로 어딘가에서 떨어져 목을 다칠까봐 한동안 공포에 떨었습…;;;; 지금도 애들이 침대 위에서 투닥거릴 때면 떨어지면 위험하다고 잔소리 폭격을 하고 있습니다;;)

    ABE문고에도, 2차대전 때 마을에 몰래 숨어든 독일병사를 몰래 도와주다가 애틋한 사이가 되는 작품이 있었는데…제목이 기억 안 나네요.

    1. Ritz

      우왕~ 이 책 아는 분 처음 만나요. ;_;
      그러고보니 미르토는 대체 어떻게 떨어졌길래 목이 그렇게 삐끗했을까 저도 궁금했었어요. -_-;

      에이브 문고는 나무위키에 의외로 누가 열심히 정리해놨는데 말씀하신 책은 ‘목화마을 소녀와 병사’인가봐요. 웹에서도 에이브 문고 이야기 나오면 저 제목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저 책은 못 읽어봤고 전집이 친척집에 있어서 대여섯권 정도 읽었던 거 같은데 하나같이 내용이 어두웠던 기억만 있네요;;

  2. 초등학생용 전집에 있을 법한 내용이 아닌 것 같다는 저만 드는 생각인가요…;;;;

    1. Ritz

      가끔 저 전집 구성한 사람이 누굴까 궁금해요; 저 전집에 나치 시절 유대인 집을 빼앗아 살게 된 독일 소녀가 그 집에 숨어살고 있던 유태인 소년을 만나면서 겪게되는 사상적인 혼란이라든지 이런 느낌의 작품이 유난히 많았어요. 하나같이 마이너해서 복간된 작품도 몇 안 되고…

      1. 말씀하신 책도 흥미로울 거 같긴 한데 뭔가 그 나이대는 안나의 일기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 느낌이 ㄷ ㄷ ㄷ

        1. Ritz

          아, 저 뺏은 집은 사실 읽어보면 로맨스 소설 느낌이 더 강해요. ^^; 남자 주인공이 멋있어서 좋아하는 책이었는데 저건 복간이 안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