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기 10월 10일

임신중에 내내 큰 문제 없이 순조로웠던 데다가 막달이 되어서도 몸 컨디션이 꽤 좋았던 편이라 출산이라고 하면 당연히 ‘진통이 온다→병원에서 말한대로 진통 간격이 5분으로 줄어들면 병원으로 간다→출산’이 되리라 한점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아이를 낳는다는 건 정말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일이더군요.

원래 10월 10일부터 이틀 정도 대나무숲의 출장 스케줄이 잡혀 있었더랬습니다. 그 전주에 병원에 갔을 때 물어보니 예정일보다 보름이나 이른 시기인데다가 아직 별 조짐 없어 보인다고 하여 만약의 경우를 조심하기 위해 출장을 다녀오기 전까지는 많이 움직이지도 말고 있다가 다녀오면 그때부터 열심히 걷고 운동도 하자,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 10월 10일 새벽 7시쯤, 문득 팬티가 슬쩍 축축한 느낌에 잠이 깼습니다. 임신 후반기에 들어서서 딱 새벽 3시쯤 되면 한번씩 화장실을 가곤 했는데 그 날은 생각해보니 화장실을 갔던 기억이 없더군요. 순간 애가 뱃속에서 방광이라도 걷어차서 소변이라도 약간 지렸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찜찜한 겁니다.
평소같으면 그 다음날 잡힌 병원 검진에 가서 물어보자 했을텐데 대나무숲이 출장도 가고 하는지라 일어나서 일단 인터넷으로 좀 뒤져보니 조기 파수라는 게 있더군요. 문득 근처의 아는 언니가 진통이 온 줄 몰랐다가 모르는 사이에 양수가 조금씩 새버려서 병원에 갔더니 양수가 얼마 안 남았다고 큰일날 뻔했다고 했다던 기억도 나고 양수가 관련된 문제라면 역시 불안해서 일단 대나무숲을 깨웠습니다.
대나무숲도 듣더니 출발 전에 확실히 해두고 가는 게 좋겠다고 하여 서둘러 병원에 전화를 해보니 가능하면 빨리 진료를 잡아줄테니 ‘입원 준비’를 하고 오라고 하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정말 파수일까 싶어서(그 정도로 미묘하게 적은 양이었음) 모자수첩과 지갑만 가지고 일단 집을 나섰습니다.

10일쯤 출장갈 일이 있다고 미리 이야기를 해서 그랬는지 간호사분이 시간은 괜찮냐면서 가능하면 원래 검진을 받는 원장 선생님을 불러주려고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단 처음 보는 분에게 검진을 받았습니다만…
….저는 정말 일본 의사는 대부분은 제가 진찰받는 원장 선생님처럼 친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더군요. -_-; 이 의사 선생은 정말 너무나 건성인 듯한 표정으로 내진을 하더니 너무나 건성인 듯한 말투로 ‘파수가 맞네요‘ 라고 하는 겁니다. 그 말투가 너무 성의가 없어서 순간 농담하는 줄 알았습니다. -_-; 저만 그런 줄 알았더니 나중에 대나무숲도 진찰실로 돌아온 그 의사가 말하는 투가 너무 건성이라 내진도 잘못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그 다음은 그야말로 대나무숲의 발바닥에 땀나는 고군분투의 시작이었지요. 일단 출장 관련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제 입원 준비를 해오는 사이 저는 간호사의 안내로 분만대기실로 향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배에는 진통과 태아의 상태를 체크하는 기계를 두르고 팔에 링겔을 꽂고 나니 그제서야 내가 정말 애를 낳는 건가 싶어 실감이 나더군요.

뒤따라 올라온 원장 선생님이 이후의 스케줄을 이야기해주는데, 양수가 터지고 나면 사실상 시간 제한은 길게 잡아도 48시간 정도라고 하더군요. 다행히 저같은 경우는 워낙 빨리 알고 온 경우라 응급처치도 빨라서 양수에 감염도 없었습니다. 그 뒤로는 주기적으로 항생제 등으로 감염을 예방하게 된다네요.
일단 그날 하루는 자궁 입구를 부드럽게 풀어주는 약을 일정 간격으로 먹으면서 진통이 걸리기를 기다려보고 그 다음날에는 분만촉진제를 링겔과 함께 투여하겠다고 합니다. 당시 의사 소견으로는 11일 오전 10시쯤에는 거의 상황 종료이지 않을까 하더군요. 가장 마지막 단계는 수술인데 저희나 의사나 공통의 의견은 가능하면 수술은 하고 싶지 않다 였더랬습니다. -_-;
초산의 경우는 약으로는 보통 별 기대를 할 수가 없다고 하긴 하더군요.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 약은 낳을 때 좀더 수월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날은 역시나 진통의 조짐도 전혀 없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하루종일 한시간 간격으로 간호사들이 ‘상태’를 물어보는데 이번에 병원에서 가장 많이 듣고 말했던 일본어가 ‘땡기기는 하는데 아프지는 않아요‘ 였던 것 같네요(내 옆 침대에서 진통을 기다리던 산모도 분만촉진제를 맞고도 진통이 안걸려서 계속 그 말만 하더군요..;)

배에 붙인 기계가 거추장스러운 데다가 간호사가 서툴렀는지 링겔 맞은 곳도 어째 은근히 아프고 새벽 이후로는 더 이상 양수가 새지도 않아 참으로 애매한 상태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밤이 되니 언제 올지도 모르는 진통을 기다리자고 병원에서 자기도 엄하고 잘 곳도 마땅치 않아 일단 대나무숲은 귀가, 저는 병원에서 마련해준 병실(옆 침대 아줌마가 정말 끝장나게 코를 골아서 간호사들도 도저히 잘 수 없겠다고 생각했는지 알아서 병실을 따로 마련해주더군요)에서 하루밤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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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 Son Avatar

    이쪽도 만만치 않은 출산기일세. -_-;;;;

    1. 리츠코 Avatar
      리츠코

      음, 아무래도 이쪽은 해외였던 데다가 수술이었으니까.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