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시작부터 조금 특이하셨던 린양의 3학년 담임 선생님은 1년 내내 보통의 교과 과정과는 약간씩 다른 방향으로 한 해를 끌고 나가셨고(엄청난 양의 체육수업과 놀이, 영화 감상 등등) 아이들과도 친구처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셔서 2학기때 면담을 가니 린양도 선생님 옆에 붙어서 상담도 하고 뭔가 재잘재잘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보통 선생님들이 남은 서류 작업 등등으로 바쁘셔서 애들이 방치되기 쉬운 봄방학 전 짧은 등교 기간에도 선생님이 밴드방에 올려주시는 하루를 보면 끊임없이 뭔가 놀이를 하고 있거나 선생님 설명과 함께 영화 감상(세 얼간이, 모던타임즈 등등 선생님이 선별하신 작품들로)을 하고 있어서 일주일을 제법 알차게 채우고 학기를 마무리했다.

종업식이 끝나고 학급 밴드방에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가 올라오고.

한해 정도만 더 계셨으면 했는데 지방으로 내려가신다고 하셔서 3학년 엄마들 단톡방에서 모두 아쉬워하고 있자니 갑자기 반장 엄마가 낮에 학교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선생님을 뵈었는데 혹시 여건이 되면 아이들을 본인 집으로 하루 불러 재우고 집밥을 한번 챙겨주고 싶다 하셨다고 의견을 물었다.

엄마들 모두 ‘감사하기는 하지만 24-5명 아이들을 어떻게?’ 하고 의아해하며 약속이 잡히면 언제든지 보내겠다, 고 했더니 정말로 일이 진행되고…
가장 많이 모일 수 있는 날을 투표로 결정했는데 그게 어제~오늘.

선생님… 저 계획은 전혀 조촐하지 않아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참석률도 엄청나서 3명 빼고 모두 참석하니 다 합쳐서 24명….

누가 보면 소풍가는 줄 알겠다…

엄마들은 미혼의 선생님이 아무래도 다 모여봤자 15명 정도 생각하셨지 않았을까, 우리 반 왜 이렇게 참석률이 좋냐며 노심초사하며 아이들을 배웅했고…
선생님의 조촐할 줄 알았으나 전혀 조촐하지 못한 1박이 시작되었다.(개중에는 엄마 떨어져서 자는 게 이 날이 처음인 아이들도 몇 있었고)

아이들이랑 보내는 도중에도 한번씩 사진, 동영상 올려주시며 잘 놀고 있다고 전해주시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잠들고 나서 정리가 되었다고 한번 더 올려주시고….
(초상권이 있으니 섬네일 캡쳐만)
엄마들은 혹시 몰라 중간중간 피자와 아이스크림 배달 넣고…

사진 마지막 글에 혼자 웃었다. 저 ‘아이고’가 정말로 ‘아이고~’하는 소리로 들려서.

이야기 들어보니 밤샌 녀석부터 칼같이 잘 시간에 잠옷 갈아입은 모범생까지 각양각색이었던 모양.
린양 말로는 따닥따닥 붙어 잤다는데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싶다.

오전에 정말로 선생님이 직접 준비해주신 아침을 먹고 우르르 버스 타고 교보 가서 두어시간 책 보고 직접 골라 계산도 하고(그 와중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한권씩 모두 책을 사주셨더란) 다시 버스로 학교 앞에 오니 대략 1시. 꼬박 24시간 가까이 24명을 끼고 다니신 선생님 진정 존경!
본인도 이 정도 난이도일줄은 예상 못하셨던지 반장 엄마와 이야기하시면서 ‘아이를 많이 낳는 건 고려해봐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고.  🙂

헤어지면서도 내내 아쉬우신지 아이들 여러번 안아주고 뒤돌아보며 걸어가셔서 마중나갔던 엄마들도 괜히 찡했다.
좋은 선생님 아래에서 깊이 사랑받고 마지막까지 평생 남을 추억이 생긴 복 받았던 린양의 1년.

그리고 집에 온 린양은 점심 먹여놓으니 조용해서 가보니 이러고 떡실신….

by

/

19 responses

  1. 난다

    아 복많은 린양. 인생에 저런 선생님 한번 만나보는 것도 로또만큼의 행운인거 같아요.
    진군 담임은 끝까지 귀차니즘이 뚝뚝
    성적표의 짧디 짧은 문장을 보니 이분은 이렇게 최소한의 에너지로 가늘고 길게 교직 생활 하시겠구나 싶었..

    1. Ritz

      이번에 민영이네 반 담임 선생님은 반 전체에 심지어 1학기 복붙 수준의 코멘트를 보내셨나보던데요. -_-; 반 엄마가 뭐가 잘못됐나 싶어 전화하니 1학기와 별 다른 게 없어 그랬다고 하셨다고… 진군 담임선생님은 한해동안 그렇게 가열차게 시험 보시더니 성적표도 좀 성의껏 써주시지…=_=

  2. misha

    직업 안정성 때문에 교직을 선택하는 분들도 많을 요즘에 린양 담임선생님은 정말로 아이들을 좋아해서,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하시는 분인 것 같아요. 20명 넘는 아이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하룻밤 재우고 싶다는 생각이 그냥 나올 리는 없을텐데… 좋은 선생님 만난 추억이 린양에게 참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 같아 부럽습니다. +_+

    1. Ritz

      어른인 저도 저런 추억이 생긴 애들이 부럽더라고요. 린양 반 남자애 누나가 자기 엄마한테 저녁 내내 동생 ‘개부럽~ 개부럽~’ 했다고 해서 빵 터졌네요. ^^;;
      학교가 저런 분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이어야 할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좀 아쉽기도 해요. 젊으셔서 작년 한해 학교 잡무는 다 맡아서 하시더란…-_-;

  3. 표현할길 없는 진정한 선생님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선생님이 아닌 글로 배웠던? 느끼던?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꺼 같은 그런 선생님 같아요.. 선생님을 잘만났는것도 린양 복이예요^^

  4. 이런 것도 복이구먼. 나는 학교에는 좋은 기억이 전혀 없어서 부럽구먼.

    1. Ritz

      그러게요. 우리 때는 학교에 별로 좋은 기억이 없는 거 같은데 작년 우리반 애들이 운이 좋았나봐요.

  5. 정말 멋진 선생님이네! 혜린이 좋았겠다~^^

  6. 마산 가기 전 마지막 서울학교라 선생님한테도 의미있는 일년이었을 듯. 혜린이한테 진짜 소중한 경험이었겠구먼~!!

    1. 그나저나 금수저 선생님이셨….

      1. Ritz

        우리도 다 그 이야기 했지. 근데 사진을 봐도 그렇고 혜린이 이야기 들으니까 혼자 사는 자취 살림이라기는 너무 커서 빈 친척집에 그런 데에 잠시 살고 계시거나 뭐 그러셨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더란. 그리고 원래 지방 유지가 장난 없다고들…

  7. 우와 대단하시네요! 근데 서울에서 마산으로 발령도 나는군요.

    1. Ritz

      원래 창원 쪽 분이시라고 들었어요. 본인이 전근 신청을 하면 지방으로 발령이 난다더라고요. 본가에서 가까운 지방으로 내려가고 싶으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1. 아 신청하면 다른지역도 되는군요 몰랐네요. 무진장 정이 많으신선생님이시네요

      2. Ritz

        올해 선생님이랑 아이들이랑 학부모 합이 좋았던 거 같아요. 1학기에 시끄러웠던 애가 전학가고 난 다음에 2학기는 진짜 분위기 좋았거든요. 서울에서 지방으로 가는 건 자리만 있으면 금방 된다대요. 대신 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건 당연히 자리가 없어서 거의 불가능하다고;;

  8. 정말 이시대 .보기더문 너무 훌륭한선생님이시다. 혜린이 앞으로 이런 훌륭한 선생님, 다시 만날수 있을까?

    1. Ritz

      일단 올해는 1반이라 주임선생님이실테니 무서운 선생님이실 듯. ( ”)

  9. 사랑이 넘치는 선생님이시네. ^^

    1. Ritz

      그러게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