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고 나니 페르메이르에 대해 궁금해서 이리저리 찾아봤었는데 생몰연도 정도만 확실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별로 남은 게 없다는 이야기만 주로 보여서 건진 게 없다가 마침 책이 보이길래 빌렸다.

지난번 칼 라르손의 책처럼 저자가 직접 화가가 살던 곳들을 돌아다니며 정리한 여행기 겸 평전이었는데 델프트의 풍경들, 화가가 그림으로 남긴 장소 등등 사진 자료도 많아서 요즘처럼 언제 다시 해외에 가볼 수 있을까 싶은 시절에는 대리만족하기에 꽤 좋은 책이었다.

다 읽고 알게 된 건

현재 페르메이르 것이라고 인정받는 게 서른 작품 정도밖에 안되는 데다가 비교적 근래 들어 주목받은 작가라(이름이 얀인지 요한네스인지 확실하게 알게 된 지도 얼마 안됐다는 모양) 이미 작품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있어서 이 화가 작품을 일부러 보겠다고 어디를 가는 건 대단히 효율이 떨어지고 일본 사람들이 이 화가를 유난히 좋아해서 가끔 전시회가 열린다는데 정말 보고 싶으면 거기에 가는 게 한 자리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겠구나 싶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아이가 정말 많았다! 😑
당시 보통 서너명 정도 낳았다는데 이 화가는 무려 15명을 낳고 그 중 11명이 살아남았다.

개종까지 하며 비교적 살 만한 집에 데릴사위처럼 들어가서 씀씀이가 좋은 후견인까지 만나 비싼 재료(이 화가 그림에 주로 쓰이는 푸른색 염료가 당시 금보다 비쌌다고)를 아낌없이 쓰며 식솔이 그렇게 많은데도 돈 걱정 없이 다작하지 않고 한점한점 작품을 완성하던 그는, 그가 살던 델프트에서는 살아생전에도 그럭저럭 이름이 난 화가였다는 모양.

그러다 마흔 즈음에 갑자기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면서 경기가 나빠지고(프랑스군을 막느라 네덜란드군이 수문을 열어 국토가 잠기는 바람에 장모가 가지고 있던 농지가 물에 잠겼다고…) 결정적으로 후원자가 사망하면서 생활이 급격하게 어려워지자 뒤늦게나마 유행에 따른 그림도 그려보고 작품 수를 늘려보려고 했지만 불경기에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건 문화산업이다보니 그림 판매가 잘 될 리도 없고, 곤궁과 빈곤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을 움켜지고 쓰러져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남은 가족들은 어쩌라고…😑)

회화의 기술. 1666~1668
페르메이르 본인이 가장 아끼던 건 이 작품이라 그의 아내는 이것만큼은 지키고 싶었는지 남편 사망 후에 급하게 이 그림만 친정엄마에게 증여해서 팔려나가는 걸 막아보려고 했으나 결국은 막지 못했단다. -_-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남편이 좋아했던 건 남기고 싶어한 걸 보니 부부 금슬은 정말 좋았던 모양)

11명의 아이와 함께 남겨진 그의 부인은 당연히 남은 그림과 세간살이를 모두 팔아치워야했는데 그러고도 역부족이라 꽤 힘든 여생을 보냈다고.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1665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나 ‘우유를 따르는 하녀’ 같은 작품들을 워낙 좋아해서 나한테는 막연하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천재’ 화가라는 신비한 인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작품들을 따라가다보니 화가의 전성기는 비교적 짧게 반짝여서 유명한 몇몇 작품 외에는 평이했고(그래서 위작도 유난히 많이 나오는 작가라고) 일생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나니 화가에 대한 매력은 좀 식었다. 🤔

마지막에는 11명의 자식과 남겨져 고군분투 했을 화가의 아내에게 위로를 보내고 싶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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