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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고 하면 보통 존 테니얼의 삽화를 제일 많이 떠올리지만 그에 못지 않게 좋아하는 버전이 아서 래컴의 일러스트여서 마스토돈 타임라인을 읽다가 이 작가에 대한 책 북펀딩이 진행중인 걸 보고 주문했다.

1865년 출간 이래 맥밀런 출판사가 독점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영국 내 출판권이 만료되는 1907년, 어린이책 역사상 가장 유명한 텍스트의 재출간에 스무 곳 이상의 출판사가 달려들었는데, 정작 새로운 앨리스에 도전하는 삽화가들의 경쟁상대는 서로가 아니라 바로 초판의 삽화가 존 테니얼이었다.
앨리스의 삽화가 존 테니얼은 루이스 캐럴 못지 않은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테니얼의 앨리스 이외의 앨리스가 왜 필요한가’에 의문을 표했고 이 냉정한 평가에서 살아남은 단 한 명이 아서 래컴이었다.

화보집 사는 기분으로 주문했는데 내용도 충실해서 아서 래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얼결에) 자세히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작가의 그림은 앨리스도 좋지만 다른 삽화들이 오히려 더 마음에 드는 것들이 많아서 삽화가 들어간 다른 원서들을 사고 싶어졌을 정도.

장화신은 고양이 중.

특히 고블린이나 이 작가 특유의 구불구불한 나무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JRR 톨킨이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받은 일러스트레이터라고도 알려져 있는 아서 래컴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영국의 삽화가로 런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했는데, 열여덟 살 되던 해 웨스트민스터 화재보험회사에서 하급 사무원으로 근무하며 램버스 예술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공부하였고, 사무원 일을 그만두고 1893년부터는 기자 및 삽화가로 근무하였다.

그의 일생은 항상 ‘느리게’ 결실을 맺어서, 서른 후반에야 결혼을 했고 마흔이 넘어서야 아이를 얻었으며 그림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마흔이 다 되어서였다. 읽는 내내 인상적이었던 건 오랜 무명 생활의 경제적인 압박 때문인지 어느 정도 성공한 이후에도 이 사람은 정말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다.

자신의 작업물에 한치의 소홀함도 용납하지 않았고 결과물에 있어서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나이가 꽤 들어서도 명성에 비하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미국과 영국을 드나들며 일감을 모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두 가지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시작했는데, 이는 오랜 세월 달성하기 불가능해 보였다. 중년의 나이가 가까워지자 둘 다 성공하는 것은 포기하고 더 시급한 것에 집중하기로 배수진을 쳤다. 그런 행보를 취한 직후 덜 중요한 목표의 성공이 이어졌고 유지되었으니, 모든 것이 헛되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경고의 긴급함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내 목표들 중 어느 것도 버리거나 타협하지 말아야 했다,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273p

그래서 그가 말년에 남겼다는 이 메모가 오히려 가슴에 걸렸다.
원하던 만큼의 성공과 부를 손에 넣었지만 정작 그가 바라던 길은 다른 쪽이었고 그것에 대한 후회는 남은 걸까.

일러스트를 감상하기에 부족함 없는 큼직한 판형과 넉넉히 실린 일러스트만으로도 만족스러웠던 한 권.

https://www.gutenberg.org/ebooks/author/6335

https://arthive.com/arthurrack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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