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양 반은 한달에 한번 정도 짝을 바꾸는데, 두달쯤 전에 1학기부터 이래저래 반 친구들과 트러블이 좀 있는 아이가 걸려서(초등학생 치고는 좀 심한 욕을 입에 달고 산다든지 자기 기분에 따라 아이들을 괴롭게 한다든지 류의) 린양과 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일단 최대한 그 아이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빌미를 주지 않고,
그럼에도 혹 때리거나 하는 경우에는 하루에 몇번이든 상관없이 선생님에게 바로 이야기할 것,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분명하게 화를 낼 것.
대충 이 정도 선에서 버텼는데 린양은 오히려 신체적인 것보다는 폭언에 가까운 험한 욕을 매일 가까이서 듣는 게 너무 싫다고 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나도 은근 힘든 시간이었더랬다.
아이 엄마한테 직접 이야기를 하면 빠르지 않은가 하겠지만 이미 그 엄마에게 클레임을 건 엄마들도 많았고 그 엄마 본인도 아이의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데 어떻게 안 되고 있는 상황인 걸 알고 있어서 두어번쯤 심각하게 전화를 걸까 고민을 하다가 어찌저찌 한달이 지나갔다.
린양은 본인이 그때 어지간히 힘들었던지 그 뒤로도 걔와 짝이 되는 아이들 이야기를 가끔 하곤 했는데, 자기 다음 짝인 여자애가 남자애랑 싸우긴 해도 걔는 선생님에게 힘든 점을 말을 안 해서 걱정이라든지, 또 그 다음짝은 린양이 친하게 지내는 친구인데 평소에 절대 학교에서 울거나 하는 일이 없을 애가 힘들어서 울기까지 했다며 심난해했다.
그러더니 11월 중순쯤에 린양이 집에 오더니 짝을 바꿀 때도 아닌데 갑자기 다시 그 아이랑 짝이 됐단다(심지어 당시 짝은 평소 린양이 짝을 하고 싶어했던 아이었는데).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해서 왜 그렇게 된 거냐고 물으니.
문제였던 아이의 당시 짝인 린양 친구가 도저히 견디질 못하겠다고 선생님에게 건의(?)를 해서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모두 눈을 감고 대신 짝을 해줄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단다.
린양 설명으로는 자기 친구는 당시에 정말 너무너무 힘들어 보였고 자기는 그 남자애랑 짝을 하는 게 그만큼은 힘들지 않았던 것 같아서 그 상황에서 손을 들었다고.(한달 동안 그 고생한 걸 잊었냐…-_-)
“야, 이… 니가 무슨 마더 혜레사라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누르며 돌려서 ‘너, 지금 짝은 니가 엄청 짝이 되고 싶었던 애잖아?’라고 물으니 ‘막상 해보니 뭐 그냥저냥’이란다.
이 상황에서는 분명 아이의 이타심을 칭찬해주는 게 정석일 거 같은데 정말 도저히 선뜻 그렇게 되지 않더라.
내가 좀 속상해하는 게 보였는지 린양은 내 눈치를 보며 ‘내가 잘못한 걸까?’라고 묻는데 차마 거기에 뭐라고는 못하고 ‘니가 해볼만해서 한 거면 됐다, 대신 이번에는 정말로 조금이라도 힘들면 바로 이야기를 해라, 엄마가 바로 그 아이 엄마한테 연락을 해서라도 말려주마’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 뒤로 한동안 학교에서 하원하는 린양에게 내가 하는 첫 말은 ‘오늘은 별일 없었어?’였고 문제의 그 아이도 그렇게 공개적으로 도중에 짝이 바뀌니 열쩍었는지, 그게 창피한 건 알았는지 남은 두 주동안은 전보다도 훨씬 조용했단다.
그리고 12월 초에 다시 짝이 바뀌고-선생님이 두 주 동안에 대한 포상(?)을 하신건지-좋아하는 여자 친구와 짝이 되어 린양은 매우 행복하게 등원 중.
이렇게 일은 다 지나갔는데 나는 그 뒤로 내내 생각이 많다.
이야기를 듣던 당시의 내 반응은 옳았던 걸까, 세상이 워낙 각박하다보니 혹 나중에 이런 면을 이용당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린양이 말한 그 ‘견딜만하다’는 선을 어느 정도 수위까지 잡는 게 옳은건지 가르쳐야하나? 이런저런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가 문득 엄마로서의 내 이기심에 씁쓸하기도.
나 역시 좀더 이타적인 인간이었다면 아이에게 좀더 다른 반응, 명료한 충고를 해줄 수 있었을까?
+이번 일들을 겪으면서 내가 다음번에 이런 비슷한 고민을 누군가에게 들으면 절대로 ‘어디에나 그런 아이는 있으니 연습하는 셈이라고 생각해’ 라는 말 만큼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린양이 형제가 없다보니 은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꽤 있다)
내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그런 아이에게 부대끼는 것도 세상을 배워나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들으니 그것도 한편으로는 울컥 하게 되더라.
34 responses
린양 대견하네요~
@ksj450 미팬이야 뭐.. 이제 막 크레파스도 남의 집 냉장고안 녹색야채쓰듯 옆자리꺼 갖다쓰고 선생님이 주의주면 살려줘요 거기 누구 없어요를 외치면서 도망가겠지만 중학생쯤 되면 철이들어 아빠와 같은 성격으로 안정을 찾을 겁니.. @tw_Ritz
@tw_Ritz 그래도 이런 고민을 하는게 낫지…전 그 남자애 엄마처럼 되면 어쩌나 심히 고민이…-_-;
@ksj450 결국 그 남자애는 지난주에 좀 크게 사고를 쳐서 반 전체가 한번 뒤집어지고 애엄마가 무슨 특단의 조치를 취한건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욕도 거의 안하고 좋아졌대요. 과정은 험난해도 아직 어리니 부모의 노력으로 어떻게든 변하기는 하더라고요.
@tw_Ritz 고민 좀 되셨겠네요. 저도 뭐 위인전에나 나오는 그런 부모는 아닌지라 맘이 무거웠을 듯. 그래도 린양이 훌륭한 일을 한 건 틀림없죠. 참 대견하네요. 감탄했어요.
@theearth 생각지도 못한 기특한 행동을 한 건 맞는데 이걸 칭찬했다가 오히려 독이 되지 않을까 고민이 되네요. 친정엄마는 아예 ‘다음에는 굳이 그러지 마~~~’ 하시더란. ^^;;
@tw_Ritz 혜린이가 생각이 어른못지 않게 깊네요. 저라면 아이가 과연 이해할지 몰라도 이렇게 차분히 대화를 시도 해볼듯해요. 과연 누군가가 나만 참으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에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 참는다고 한다는 것은 친구가 나쁜 행동을 했을때 모른 척을 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일꺠워줄 것인가.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직접 설명을 해줄 것인가 선생님에게 이를 것인가. 다 아이의 생각을 알아보고 또 좋은 방향을 모색하는 결론없는 토론 같은 대화인데. 전 제 아이가 부당함을 당했을때 그냥 혼자 속으로 삭히며 병드는 일은 없었으면 바래요. 극단적인 예를 들면 매맞는 엄마가 아이를 위해 자기만 참으면 된다는 식의 발상같은 거. 저도 사회생활을 하다 느끼는 것은 타인과 마찰이 날때 불우한 앞날이냐 사소한 돌뿌리에 그치느냐를 결정하는 건 논리의 무장이 아니라 그냥 초반의 기싸움이더군요. 안하무인은 남의 대화를 듣지 않으니 내 예의와 법칙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나면 그냥 앙금만 되니까요. 어느 조직에서건 친구가 많다거나 남에게 주목받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할수가 없어요. 막대했다가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까봐 몸사리게 되는건 철들면 깨닫기 마련인지라 혜린이가 대신 짝이 되어줬다면 눈감고 손을 들었다한들 같은반 아이들은 누가 손을 든 것인지 알게 되었겠죠. 울었던 아이는 고마워할수도 있고, 선생님도 관심을 가져줄 것이고 친해지고 싶어 다가오는 아이도 늘어날거예요. 그런 온유한 카리스마는 괴로운 일이 있어도 친구들과 누그러뜨릴수도 있고 자신이 힘들떄 대신 나서줄 친구도 얻을 수 있겠죠. 뭐 이런 해피엔딩이야 말로 부모의 이기심이 낳는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고립되지 않길 홀로 감내하는 일이 없도록 사람들의 중심에 설수있게 지켜봐주는 게 결국 부모가 할수 있는 모든 혹은 유일한 역활이 아닐까 싶어요.
@Oruk_theGiant 학교 들어가니 확실히 애한테 ‘반드시 화를 내라’고 말해주는 일이 늘었어요. 아이들 세계는 아직 미숙해서 양보하고 참는다 한들 그게 답이 아니겠더라고요. 자리를 바꿔준 친구는 린양한테 몇번이나 고맙다고 했고 반 애들도 집에 가서 다들 이야기를 했는지 길에서 다른 엄마들 만나면 기특하다고 인사를 하시는데 이런 게 모여서 은연중에 애한테 다시 ‘착한아이 컴플렉스’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저는 왠지 그것도 그리 기쁘지가 않네요.
너무 착하고 예쁜아이네요
엄마입징에서야 속상하죠.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린양이 대견하고 또 그렇게 교육시키신 릿츠님도 훌륭하십니다.
가끔 저렇게 엉뚱한 짓을 하네요. 내가 낳았지만 알 수 없는 게 애 마음인 듯요.
짝짝짝~~
@tw_Ritz 린양도 레벨업! 리츠코님도 엄마레벨업!
나는 그거 혜린가 그 만큼 정서적으로 탄탄하고 심리적으로도 훨씬 우위에 있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한 게 아닐까 해. 대단하네.
저도 다른 집 애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인상적이었을 거 같은데 내 자식이 되니까 엄마 입장으로는 기냥 속상하더라고요. -_-; 참, 간사한 게 사람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