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ula Rasa

범죄 수사물 쪽을 좋아해서 그런 장르 위주로 자주 보다보니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은 이런 걸 자주 추천으로 띄운다.

사실 넷플릭스에 범죄 사건에 대한 다큐는 이미 꽤 많고 본 것도 좀 있어서 언뜻 섬네일로 뜰 때는 별로 생각이 없었는데 메인에 움직이는 예고 영상을 보다가 궁금해서 검색했더니 다큐용으로 일부러 찍은 영상은 하나도 없이 전부 당사자와 주변인들의 실제 SNS 영상, 혹은 수사 중에 찍어놨던 자료들로만 만든 다큐멘터리라고. 왠지 예전에 본 영화 ‘서치’ 생각이 나서 틀어봤는데 내용은 당연히 그것과는 전혀 다른 완전 실화.

2018년, 콜로라도 주에서 임산부 섀넌 와츠와 두 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결국 범인은 그녀의 남편으로 밝혀지는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 수사 과정을 섀넌의 페이스북 영상들과 증거로 썼을 법한 집안의 CCTV 영상, 그리고 섀넌이 지인들과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들만으로 구성했다.

희생자인 섀넌은 요즘으로 치면 브이로그를 열심히 찍는 SNS 중독에 가까워서 정말 많은 영상이 남아있고 당연하지만 거기서 보이는 가족은 세상 행복한 모습이라 ‘뒤에서는 남편과 별거를 하네마네 비참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가장 빛나는 모습만 보이고 싶은, 이게 SNS의 함정이지’ 싶어 씁쓸해진다.
요즘은 미국은 경찰이 신고 받고 가정집에 진입하거나 할 때 모두 영상을 남겨두는 게 절차인지, 실제로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이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 상황과 주변 사람들(연락이 안 되니 이상해서 경찰에 신고한 섀넌의 친구와 뒤늦게 도착한 남편 등) 찍어놓은 것들이 나오는데 이미 누가 범인인지 알고 봐서 그런가, 정말 놀란 척 연기라도 좀 하지 싶을 정도로 어색한(임신한 부인과 아직 너덧살밖에 안 된 두 딸이 없어졌는데 멘탈이 나갔다기보다는 마치 꽃병 깨놓고 엄마한테 들킬까 안절부절하는 듯한 느낌의) 남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 같은 보통 사람에게도 한눈에 어색해 보였으니(사람 보는 건 다 똑같은지 CCTV를 제공한 옆집 사람도 수상해 하더라…) 경찰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을 테고 범인은 바로 다음날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 못했고 사흘째쯤에 결국 자백을 하는데 그 와중에도 부인이 애들을 죽여서 그랬다는 둥 수사에 혼란을 주지만 결국 결론은 바람이 나서 새출발할 욕심에 계획적으로 저지른 범죄였고 5번의 가석방 없는 종신형과 징역 84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라고.

사실 내용으로만 보면 대단한 반전이랄 것도 없는(처음 신고 받고 간 날 찍은 영상 보면 남편 이마에 대문짝만하게 범인이라고 적혀있는 것 같음) 평범한 범죄 사건 관련 다큐멘터리인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찍은 게 아닌 그저 일상의 영상만으로 필요하면 이렇게 한 편의 범죄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요즘의 우리는 정말 많은 걸 영상을 남기며 살고 있구나 새삼 절감하게 되고, 보는 내내 화면들이 유난히 날 것처럼 느껴져서 이상하게 기억에 길게 남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