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린양 학교는 남녀 비율이 2:1 정도라 한 반에 남학생이 20명, 여학생은 10명 남짓.

지난 학기에 하루는 린양이 집에 와서 하는 말이 남자애들이 칠판에 손가락 모양을 그리며 지들끼리 킬킬대고 심지어 여선생님이 들어오니 무슨 사상 검증마냥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하더란다.
그래서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디, 했더니 평소에도 인터넷 잘 모를 것 같은 선생님이라 그런지 그게 뭔데 하고 지나가셨단다.
칠판에 그러고 있으면 여자애들은 가만히 있느냐고 물으니 애들은 그냥 ‘쟤들이 또 저러는구나’ 하는 정도로 무시하고 지나가는 모양. 순간적으로 나는 너무 화가 나는데 속상한 건 남자애들이 두 배나 많은 교실에서 그 상황에 굳이 린양이 나서서 화를 내야한다고 할 수도 없다.

이 일이 최근까지도 꽤 길게 머릿속에 남아있었는데 요며칠 안산 선수 온라인 학대 건 때문에 보기 싫어도 눈에 들어오는 쓰레기같은 말들 중에 “페미로 오해받기 싫으면 알아서 숏컷을 안 할 것이다”라는 글을 보니 린양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화가 치솟았다. 사람들은 지금의 2~30대 남자들을 비난하고 있지만 과연 그게 그들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지? 지금 중학교 2학년 교실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동안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인간들이야 늘 있어왔지만 최근 기업이나 공기업조차도 말도 안되는 소리에 즉각적으로 ‘사과’를 하며 반응해주는 걸 보며 딸을 가진 여성으로서 앞으로 내 딸이 살아야 할 세상에 대한 걱정이 조금씩 늘고 있었는데 이번 안산 선수 건을 보며 이번에도 또 누군가가 사과를 하면 어쩌지, 하는 순간적인 공포감은 가뜩이나 더위에 시달리며 매일 흔들흔들하던 멘탈에(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공황장애는 여름에 더 심해지더란. 신경이 온도에 민감해서 그렇다고…) 제대로 대미지를 입혀서 그 뒤로 이틀 가까이 공황으로 너무 힘들었다. 😑

각설하고.

그리하여 요즘 내가 답을 찾고 있는 문제는 중학생 여자아이가 같은 또래 남자아이에게 ‘너 페미냐‘ 라는 질문인지 공격인지 모호한 그 무언가를 들었을 때 어떻게 답해야 두 말 안 붙이고 깔끔하게 끝낼 수 있을까 하는 것.

린양에게 물어보니 ‘왜?’라고 하겠다는데 나는 그 말에 두 마디 이상 오가는 게 싫어서 저 나이대가 알아들을만한 단호한 한 마디를 찾고 싶고 아직도 답을 얻지 못했다. 좋은 의견 절찬 모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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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responses

  1. dan

    트위터에서 본 것 중에 가장 인상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한건
    ” 넌 성 차별 주의자야?”라고 되묻는 거였어.
    물음에 물음으로 대답하는거 안 좋아하지만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굳이 대답해야할까…
    저 질문에 “응”이라고 대답하는 멍청한 놈이 있다면 상종 안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봄.
    근데 정말 애들이 필터링 없이 막한다는 글들을 봤는데 정말 심각하네. 선생님께도 저러면 친구들에게는 아주… 감히…

    1. Ritz

      이게 중학교 애들한테는 어른들 기준의 ‘사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터넷 밈쯤으로 생각하고 물어보면 상대방이 당황하는 걸 즐기는 놀이로 여기는 거 같아서 더 고약해. -_- 나도 저 대답을 트위터에서 보긴 했는데 문득 드는 생각은 저런 질문을 하는 수준이 저 성차별주의자 라는 용어는 뭔 줄 알까 싶은거지. -_-
      돌아다니는 글 중에 페미니즘 관련 책 보고 있는 애한테 어떤 넘이 ‘너 페미야? 어? 페미니즘? 이건 뭐지? 페미 아닌가보네’ 하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더란…( -_)

      얘네도 사회생활이다보니 1년동안 한 반에서 공부해야하고 심지어 수행평가 하다보면 같은 조가 될 수도 있으니 무례하다고 상종 안하고 살기도 어렵지. ^^;

      우리 부부는 요며칠 이야기해봤는데 정말 애가 다른 남자애한테 그런 질문을 받고 오거나 하면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해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아이들 전체에 대해 대처가 필요하다고 어필하기로 했어. 내 아이한테 대답을 가르칠 고민을 할 게 아니라 질문하는 애들에 대한 교육을 외면하면 안되겠더라고.

  2. 비극의 시대로세…
    긍정/부정을 나타내는 한 마디가 가장 깔끔한 법이지. Yes or No.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때에 말이 길어지면 그 이후로는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라오.

  3. 저는 소수 커뮤니티 게시판에 있는 글을 언론이 확대 재생산 한 일 쯤으로 생각했는데 요즘 한국 사회 분위기 자체가 이상한가 봐요. 아이들까지 그렇다면 정말 큰 일이네요.

    1. Ritz

      일단 이번에 문제가 됐던 커뮤니티가 규모가 작다고 볼 수 없는 것도 문제, 우리나라가 가정이나 학교에서 별다른 교육이 없으니 아이들이 아직 제대로 가치관이 형성되기 전에 그런 사이트에 아무 규제 없이 언제든지 접근하고 그런 곳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멋있다고 보는’ 것도 문제 같아요. 뭣보다 저런 곳에 마이크를 대주는 언론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기업의 책임도 크죠. -_-

  4. 참 답답하다 ㅜㅠ
    ‘그거 차별주의 발언이야’ 정도? ㅜㅠ
    아니면 헐, 뭐래.. 하며 그냥 지나가기?

    1. Ritz

      딸내미에게 이 의견도 전달하겠음~ : ) 사실 아직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내가 괜히 노파심에 혹시라도 저런 일이 있으면 단호하게 대응했으면 하는 거라 말이지. ^^;

  5. 너무 갑갑하고 슬프네요. 세상에…

  6. 어이가 없어…

  7. 사상검증이면 지들부터 알아야하지 않을까싶네요 진짜…페미가 뭔데라고 되물어야하지 않을까요? 뭔지 알긴 알고 묻는건지 원…아니 어쩌다 페미니즘이 욕이 되는 상황까지…요즘 보면 정말 평등을 찾을데 안찾고 지편할데만 들이대는 느낌이…

  8. 큰일이다… 내 아들놈 교육 잘 시켜야지.

  9. …..깝깝하네요 정말. 뭔가 말이 턱 막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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