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아침부터 눈이 엄청나게 내렸습니다. 기온도 뚝 떨어져서 3월이라기에는 너무나 춥더군요. 아침에 TV에서 아나운서가 바닥에 자를 푹 꽂고 ‘약 1센티 정도 쌓였네요~’ 하는 것을 보고 난 후 이케부쿠로의 도큐핸즈를 한바퀴 휘익 돌고 빅 카메라에 들렀다가 신주쿠로 출발했습니다.
목적지는 기노쿠니야.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갔던 큰 서점들 중에서는 이 기노쿠니야가 제일 마음에 들더군요. 정리도 잘 되어 있어서 뭘 찾기도 쉬운 편이고 도큐핸즈와 백화점이 연결되어 있어서 편했습니다.

아무래도 밖에서 돌아다니다보니 내내 점심이 늦어졌는데, 이날은 어디 움직이기도 애매해서(게다가 이미 다리도 발바닥도 장난 아니게 쑤시는지라) 옆에 붙어 있는 백화점의 식당가로 향했습니다.

왼쪽 위의 치즈 들어간 빵이 엄청 맛있었음
샐러드 소스가 뭔지 모르겠는데 콩가루를 넣은 것처럼 고소해서 기억에 남네요.

어디 만만하게 먹을 만한 데가 없을까 찾다가 들어간 곳은 파스타와 이런저런 메뉴를 파는 가게였는데, 큰 기대 안했다가 뜻밖에도 엄청 맛있어서 다들 횡재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맛있는 것만 먹으면 그저 만족하는지라..;)
주문한 것은 런치 세트였는데 괴수가 시켰던 토마토 파스타는 그냥 보통 가게에서 나오는 파스타 치고는 소스 맛이 개성있어서 놀랐습니다(우리나라에서 대부분 나오는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는 왠지 오뚜기스러운지라..;).
선배와 내가 시켰던 볶음밥에는 위에 덮힌 계란이 우리나라식 얄팍한 지단이 아니라 두껍고 위쪽은 살짝 익혀 부들부들한 상태여서 그야말로 감동이었습니다. 계란 두께도 두껍고 접시를 내려놓는데 지단 부분이 찰랑찰랑 흔들리더군요.
계란 때문에 볶음밥이 120% 더 맛있는 듯했습니다.

후식으로 시킨 딸기 밀피유~
과일들도 싱싱하고 생크림 맛도 최고.

저녁때는 괴수의 일본인 친구에게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이 모두 나온다기에 아무래도 좀 가기가 머쓱했는데, 일단은 저와 선배까지 함께 출발.

약속 장소는 긴자 미츠코시 백화점 앞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거의 처음 가보는 엄청나게 화려한 번화가였네요. 시간이 좀 더 여유있었으면 미츠코시 백화점(의 지하 식품관)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도착하니 바로 문 닫을 시간이어서 약간 아쉬웠습니다.

괴수에게 일본인 친구가 있다길래 의아했던 점은 역시
1. 일본어를 전혀 못하는(하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건 모두 읽을 수 있는) 괴수가 대체 어떻게 일본인 친구를 사귀었는가
2. 의사소통은 대체 어떻게 하는가
였습니다만, 하와이에서 유년을 보낸 영어가 능통한 일본인이었더군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놀란 것은 괴수의 영어가 ‘의사 소통이 가능할 만큼(!)’ 능숙했다는 점이었습니다.(영어체조학과인줄 알았더니 정말로 영문과였단 말인가!)

미역밖에 안 보이지만 저 안에는 게가 잔뜩 들어있음

약속 장소에 나온 사람은 괴수의 친구, 그의 부인 그리고 너무나 귀여운 아들이었습니다. 일행이 이동한 곳은 긴자의 어느 철냄비요리집이었는데, 메인 요리였던 철냄비 요리도 독특했지만 그 앞에 나왔던 치킨이 기름기도 하나 없이 정말 산뜻하니 맛있더군요. 저는 메인인 냄비 요리보다 그 닭이 더 기억에 남네요.

이 날은 그야말로 언어의 아수라장이었던 것이 괴수와 친구분은 영어로,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일본어로 이야기를 해야 했던지라 나중에는 괴수의 친구분은 ‘일어하다가 앙드레 김처럼 발음 꼬이는’ 경지에 이를 지경이었지요.
저같은 경우 태어나서 가장 일어를 많이 한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얼마나 알아듣고 대답을 한 건지는 저쪽에서 내 말을 얼마나 알아들었는지는 며느리도 모름 -_-)
이번에 새로 안 놀라운 사실은 ‘술이 들어가니 외국어가 잘 나오더라’. 그렇다고 외국어를 해야 하는 자리에 매번 술을 마시고 나갈 수도 없고 난감한 노릇입니다.(…)

소위 요즘 한류의 힘에 대해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건 이런 자리에서 한국의 이런저런 배우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거리가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요즘 천국의 계단에 나오는 권상우나 군대 간 송승헌(…)도 좋다든지 하면서 더불어 이병헌도 좋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한국에서 이병헌은 그다지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라기보다 내가 싫어함. -ㅠ-)고 하자 자신이 보기에는 착하기보다 도도하고 남을 내려다보는 듯한 이미지가 멋지다고 하더군요.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에 대해 찐한 의심을 품으며 그래도 어찌어찌 하다보니 시간은 잘도 가더군요.
12시가 가까워져서야 부인과 아이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네 사람은 괴수 친구분의 집이 있는 신 오츠카 역 근처의 가게 간판도 없는 아담한 바에서 2차까지 마시고 기온이 뚝 떨어져 도저히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 저와 선배는 숙소로 돌아왔습니다(물론 괴수와 그 친구분은 이후에 3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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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sponses

  1. 리츠코

    롯>아무래도 술을 마시면 뵈는 게 없어져서 그럴지도… 다음날에는 전날의 반도 말을 제대로 못했거든.

  2. 대담해져서 그런 거 아닐까. 역시 외국어는 배짱?

  3. 리츠코

    마아가린>결코 실력이 느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_=;
    술판의 괴수>나도 하와이에서 알로하~를 추며 유년시절을 보내보고 싶군. -_-;;;
    삭은이~>저는 일본 백화점 식당가는 오사카 여행때 이후 두번째였는데 오사카에서는 별로 특별히 맛있다는 생각은 안 했었거든요. 그것도 지역마다 다른 모양?

  4. 삭은이~

    일본 백화점 식당가는 대부분 괜찮은듯.. 저도 친구들과 여행하다 시간이 애매해서 백화점 식당가에서 먹은적이 있는데 상당히 맛있어서 꽤나 놀랐던 기억이 나는군요.

  5. v-_-v (은근슬쩍 양 손을 올려 V자를 감아쥔..;)

    사실은 나도 ‘하와이에서 유년을 보낸 영어가 능통한…’ 한국인이고 싶었다고; -0-

  6. 마아가린

    술마시면 외국어 잘나온다…올인!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