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작년인가, 마침 별로 읽을 것도 없는 타이밍에 난다님이 추천해서 충동구매했던 책.
하루키는 소설은 취향이 아니지만 에세이는 괜찮으니까 싶어 샀는데 그 뒤로 더 땡기는 책들이 생겨서 방치했던 것 같다.
트위터도 끊고 읽을 거리도 없으니 가볍게 보기 좋겠지, 하는 마음에 잡았는데 기대했던 것과 다른 의미로 재미있게 읽었다. 🤔

나온지 오래된 책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중년이 되어(나는 서른 여섯 살이니 이제 싫든 좋든 중년 초기에 속한다) 가장 곤란한 일은…

p.111

라는 문구가 있어서 대체 서른 여섯이 중년 초기면 어느 시절이야 하고 찾아보니 1986년 작. 원제는 「村上朝日堂の逆襲 무라카미 아사히도의 역습」(‘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이 왠지 더 눈에 들어오긴 한다. 이 에세이는 재미있었음.)

나는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투표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어째서냐고 물으면 한마디로 뭐라고 대답하기 힘들어 “글쎄요, 왜일까요?” 하며 얼버무리는데, 좌우지간 투표를 안 한다. 정치적 관심이나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투표는 안 한다.

p.162 정치의 계절 中

찾아보니 얼마전 ‘고양이를 버리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하루키 에세이를 읽은 게 거의 7~8년 전. 그때는 분명 이 작가 에세이를 재미있게 봤는데 이번에 이 책은 그런 의미로는 정말 재미가 없었다.
자기는 아파본 적이 없어서 누가 ‘아프다’고 하면 그 통증이 어떤 건지 몰라서 공감해주기가 어렵다느니 투표를 한 적이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다든지(그 뒤로도 작가는 투표를 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하루키의 에세이가 워낙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내용이라 그런가, 30대의 하루키는 다소 철없고 심술궂기까지 해서 40대의 나는 그걸 읽으면서 즐길 수가 없었다.

얼마전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상이라 어쩌면 읽을 당시에는 재미있었던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라든지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도 지금 다시 읽으면 그때랑 다르려나? 좀 궁금하다.

어쩌면 에세이라는 장르는 작가의 공개적인 일기장과 비슷해서(작가마다 에세이 성격이 달라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작가의 과거가 풋풋하든 무모하든 이렇게 타인이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게 ‘박제’되는구나 하는 점이 다른 의미로 재미있었다. 30년 전의 글로 지금의 하루키를 가늠할 생각은 없지만 젊은 하루키는 좀 의외였다는 이야기.
예전에 어느 에세이에서 하루키는 지나간 자기 책은 다시 펴보지 않는다고 했으니 뒤늦게 읽은 나같은 독자는 괴로워도 작가 본인은 괴로울 일이 없을지도. 🤔

앞으로 하루키 에세이는 가능하면 신간 위주로 잡아야겠다.

2 responses

  1. 하아.. 내가 하루키 수필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세라복을 입은 연필이었는데. 하기 그게 나도 20대 시절이었다. ㅎㅎ. 지금읽으면 다르 느낌이겠어.

    1. Ritz

      당시에 인기가 많았나봐. 타입 아저씨도 읽었더라고. 내가 읽으면서 툴툴거렸더니 시대를 감안하고 봐야하네 적극 변호하시더란. 아마 지금 다시 읽으면 그때만큼 재미있지 않아서 깜짝 놀랄지도? ( ”) 때로는 재미있게 봤던 책은 그 재미있었던 기억만 남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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