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eeru왕 님이 내 생각이 났다며 추천해주신 책.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책을 펼치자마자 마주한 이 문구에, 손바닥만한 화분 몇 개만으로 매일 허덕이고 있지만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졌다.

나에게 카렐 차페크라면

https://www.karelcapek.co.jp/

이 홍차 브랜드가 먼저 떠오르지만 실제 카렐 차페크는 극작가, 각본가, 수필가, 출판업자, 비평가 등 다양한 활동을 한 체코의 작가로 로봇(Robot)이라는 단어의 창시자.

어쩌다보니 이 작가 작품은 읽은 게 없었는데 첫 만남은 에세이가 됐다.

책의 삽화는 그의 형제인 요세프 차페크가 그렸다.

그리고 아직까지 맨 땅에 무언가를 심어본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나도 화분에 키우고 있으니까’ 라며 슬쩍 비비작대며 식물을 키우는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고 웃으며 책장을 넘겼다.

아마 작으나마 정원을 가꾸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보다 훨씬 깊게 공감하며 즐겁게 읽을 듯.

여리디 여린 델피니움 꽃대를 채 묶기도 전에 폭우가 내리기 시작하고 그저 처마 밑에 기대어 서서 비바람에 두드려맞는 정원을 지켜보며 찢어지는 정원가의 마음은, 어렵게 꽃이 피기 시작한 화분을 미처 들이지 못해 속절없이 비를 맞아 녹아버린 제라늄 꽃을 보는 내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을 테니까.

누가 가드닝을 목가적이고 명상적인 일이라고 했나. 마음을 바쳐서 하는 모든 일들이 그렇듯, 가드닝 역시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열정 그 자체다.

p.33

그래서 한번 손대기 시작하면 자꾸 화분 갯수는 늘어난다.

카렐 차페크는 이 책에서 정원가를 ‘A로 시작하는 식물부터 Z로 시작하는 식물까지 모든 종을 모을 기세인 사람’과 한 종류에 꽂혀서 그 식물의 ‘모든 종’을 모으는 사람으로 나눴는데 이걸 읽으면 국가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다 비슷하구나, 다시 한번 통감했다.

독일 철학에서는 현실이란 그 자체로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며, 더 높은 도덕률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das Stin-Sollende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7월의 정원가들은 이에 특히 공감하며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매우 잘 알고 있다. 정원가들의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다.

“비가 와야 된다.”

p.123

한 해는 언제나 봄이고, 인생은 언제나 청춘이며, 꽃은 언제고 핀다. 가을이 왔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우린 다른 방법으로 꽃을 피우고, 땅 밑에서 자라며, 새로운 싹을 펼쳐내느라 여념이 없다. 주머니에 손 넣고 있는 자들이나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말을 쉽게 내뱉는 법이다. 일 년 열두 달, 심지어 11월에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존재들은 가을을 모른다. 찬란한 여름만이 계속될 뿐이다. 그들에게 쇠락이란 없다. 오직 발아만 존재한다.

p.140

어떤 의미에서 우리 정원가들은 미래를 위해 살아간다.

장미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내년에는 훨씬 더 탐스러운 꽃이 피겠지 생각한다. 이 작은 새싹이 몇 년 후 나무로 자라나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p.200

에세이는 내내 문장은 조금 니힐한데 신기하게 반짝이고 희망찬 내용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루키의 에세이가 생각났지만 다 읽고 나니 하루키를 떠올린 게 미안할 정도.

식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쯤 읽어볼만한 즐거운 책이었다.

추천해주신 분께 감사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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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sponses

  1. 이 책이 《원예가의 열두 달》(맑은소리, 2002)로 나왔을 때 읽었답니다. 원예가의 뒷모습을 보면 엉덩이밖에 안 보이지만 쭈그리고 앉은 다리와 구부린 등은 불편한 부위라며 딱정벌레 같은 몸매로 진화하고 싶다거나 팔다리가 접이식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부분을 읽으며 엄청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로봇(Robot)이라는 용어를 만든 문학가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1. Ritsko

      소소하게 공감가는 문장이 너무 많아서 읽는 내내 너무 재미있었어요.

      에세이 내용 생각하면 왠지 SF 장르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데 그렇더라고요. ^^
      그래서 작가인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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