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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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도착한 날 딸내미가 먼저 잡더니 웬일로 눈 한번 떼지 않고 읽어내리길래 어지간히 재미있나보다, 했는데 나도 거의 한달 가까이 길게 책을 손에 잡은 날이 없었건만 어제 밤에 손에 잡고 하루만에 완독.

<이웃의 영희 씨>를 읽을 때 마음에 들었던 카두케우스 시리즈가 좀더 추가돼서 좋았다. 처음에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강경옥이나 김진의 SF 이야기를 좋아하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는데 이번에도 그 느낌은 여전했다.

무한한 슬픔은 크기가 같아서 더 큰 슬픔과 더 작은 슬픔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 아니야. 아침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빛나는 나무를 보고 비 온 뒤에도 세상이 맑고 아름답다고 감탄했다가 원래 여기는 새벽안개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슬펐어. 더 작은 슬픔이 더 큰 슬픔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듯이 슬펐어.

─ p.172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그게 어떻게 해야 ‘말이 될지’ 설정에 매몰되지 않고(내가 요즘 유튜브 과학 채널들을 너무 봤더니 말이 되니 안 되니에 핏대 올리는 게 좀 피곤하드라. 😮‍💨) 인간의 ‘감정’을 이렇게 촉촉하게 써내려가는 점이 너무 좋다. 어제 잠깐 본 드라마 <조명가게>에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똑같다”는 대사가 있었는데, 아무리 인간이 우주로 나가고 사는 세계가 넓어져도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들도 지금과 같은 부조리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후반부의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 파트는 아포칼립스 장르라 읽는 내내 다시금 코로나 시절이 생각나고 한편으로는 얼마전 실패한 계엄이 성공했더라면 이것과 다르지 않았을 세상처럼 느껴져서 좀 우울해졌지만 좋은 문장은 리듬을 타듯 머리로 술술 들어오고 그런만큼 책장의 무게도 한없이 가벼워서 오랜만에 즐거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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