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이번주의 영화는 뜻밖에도 다큐멘터리.
요시토모 나라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옆사람은 가끔 미처 모르고 있던 신간 같은 걸 사다주곤 해요. 이번에도 웹에서 좀 찾아보니 의외로 평이 좋았다며 빌려온 게 이 ‘요시토모 나라와의 여행’.
그림을 좋아하지만 정보를 열심히 체크하는 편이 아니라 이런 게 나와있는지도 몰랐었네요. 말 그대로 2005년~2007년 정도 사이의 요시토모 나라에 대한 다큐멘터리였어요.

그 전까지는 혼자 그림을 그리는 걸로 충분했던 나라가 A to Z라는 전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크리에이티브 유닛인 graf 팀과 함께 세계 도시들을 다니며 끊임없이 ‘작은 방’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하나의 컨셉으로 도시만 옮기고 매번 같은 걸 조립하는 게 아니라 그 도시에 도착하면 컨셉을 잡고 거기에서 떠오른 ‘작은 방’을 꾸민 후 전시가 끝나면 다시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그야말로 작가 본인 말대로 ‘이게 끝나면 그대로 은퇴해도 될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한 느낌.

다큐멘터리의 시작은 의외로(?) 서울이었고, 20대 정도의 여자들만으로 가득해 보이는 팬 미팅에 온 한 7살 한국인 소녀가 나라에게 그림을 너무나 좋아하고 힘이 들 때면 요시토모 나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요. 그저 아이의 이야기에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법한데 ‘그 안에서 순수하게 내 그림을 봐 준 사람은 분명 그 작은 여자애 뿐이었어'(그 외에는 대부분 저 사람이 왜 결혼을 안 할까에 관심이 있었을지도… ^^;) 라며 감명받는 나라를 보며 나중에 그 아이의 엄마가 나라에게 보낸 ‘자그마한 아이의 이야기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진심으로 받아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는 편지에 공감했어요.

생각해보면 그림은 좋아하지만 굳이 작가가 어떻게 생겼다든지 그 외의 정보에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던 듯해요. ‘요시토모’인이 ‘요시모토’인지 안 헷갈리게 된 것도 불과 몇년 안 됐거든요.

그림만 봐서는 어딘가 좀 까칠하고 신경질적인 인상이 아닐까 했는데 의외로 반듯한 호남형에 까칠하기보다는 세상과 마주하는 게 수줍어서 그림으로 도피한 듯한 사람이었어요.

본인이 중간에도 말하지만 운 좋게도 이미 화가로서 충분히 인정도 받았고, 조금은 유명인으로서 거만해도 될 법한데 시종일관 나이에 비해 사심없이 순수한 인상이더라구요.

근래의 신간들을 보면 그림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서 예전의 그 삐딱하고 껌 좀 씹는 느낌은 많이 사라지고 어딘가 몽환적인 좀더 오묘한 여자아이 그림이 많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대한 이야기도 직접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만 앞으로의 새로운 그림들에서는 예전의 그 날카로운 느낌을 만나기 힘들 거라는 게 좀 아쉽네요.

캠코더로 찍은 듯 어딘가 투박해서 화면 전환이라든지 연출이 보통의 영화처럼 말끔하게 다듬어진 느낌은 덜했지만 그게 또 어떤 면으로는 수줍어 하면서도 매번 감독의 질문에 자신의 머릿속 생각들을굉장히 열심히 말로 설명하는, 소박한 인상의 나라와 잘 어울렸어요.
그야말로 어떤 드라마틱한 연출이나 사건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한 화가의 이야기였습니다.

문득 예전에 갔던 오모테산도의 A to Z 카페가 그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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