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아마 내가 안네와 비슷한 나이였고(아마 대충 지금 혜린이 나이쯤이었던 듯) 지금 나는 안네와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는 엄마가 되었다.
예전에 읽을 때는 나와 비슷한 또래 소녀의 이야기에 안타까웠다면 지금은 내 딸과 비슷한 또래의 소녀의 불행이 각도를 조금 바꿔 다시금 가슴을 때린다.

처음 읽었던 어린 시절에는 안네의 불안정하고도 고민 많은 감정의 기복에 공감했었는데 정말 수십년만에 다시 잡으니 내가 부모로서 저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야한다면 어떤 심정일지, 그때는 신경쓰지도 않았던 그들을 둘러싼 환경과 상황, 안네의 사춘기 감성이 아닌 절망 속에 무너지지 않으려 끊임없이 다잡고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그래도 지금이 나쁘지 않아’ 라고 적어내려가는 안네가 보인다.

이들의 은신처 생활은 (안네 본인도 계속 이야기하지만) 어쨌거나 당시 다른 유태인들에 비해 준수한 편이었고 이 모든 준비를 한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능력과 재력(…)에 감탄했다.(이것이 어른의 시선… -_-; )
가장으로서 딸 둘(그것도 사춘기의!)과 아내를 최대한 좋은 환경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얼마나 백방으로 뛰었을텐데 그렇게 힘들게 유지한 은신처 생활이 한순간에 부서진 후 돌아와서 혼자만 남았음을 알게 됐을 때의 그 망연자실함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예전에 이 책을 읽을 때는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당시 상황에 다소 낙관적이라 먼 해외로 도주하기보다는 가까운 네덜란드로 이동했다고 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니 충분히 위기를 느꼈으나 미국으로 이동하려고 한 타이밍이 늦어서 독일군이 네덜란드에 들어온 시점에서 미국 대사관이 폐쇄돼 움직일 방법이 막혀버렸고 그 뒤로도 어떻게든 나가보려고 했던 모양.(안네 프랑크의 아버지 편지 뉴욕서 발견)
우리는 현재에서 과거의 그들을 보며 아쉬워하지만 2차대전 전쟁사를 보다보면 그 당시 많은 상황들이 어처구니없이 흘러갔고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선택하면서 아마 그 생활이 그렇게 하염없이 길어지리라고는 예상 못했지 싶다.

이 나이가 되어 읽으니 안네의 필력은 새삼 나이에 비해 정말 훌륭해서 살아남았다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명히 세상에 큰 획을 긋지 않았을까, 많이 아쉽다.
이 불행한 상황에 지지 않겠다며 그 작은 세계에서 많은 것을 고민하고 사랑하는 마음도 싹틔우며 바지런하게 보냈던 그녀는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수용소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버텨 바깥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을텐데, 새삼 안타깝다.

책으로 볼 때는 책장문 뒤 공간이 굉장히 좁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은신처가 있던 건물 구조도를 보니 의외로 넓다;;(물론 거주인구 생각하면 좁지만)
건물 오른쪽에 저렇게 큰 공간이 있는데 아무도 의심을 안 한건가;;;

찾아보니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검색만 하면 웹에서 가상현실처럼 은신처 구경까지 할수 있어 놀랐다…; 이 나이가 될 때까지도 글로 막연하게만 상상하던 공간이었는데 책장 너머로 계단을 올라 가장 꼭대기의 페터의 방으로 들어가니, 아 저 창이 밤마다 안네와 페터가 나란히 앉아 갑갑함을 조금이라도 씻어보려고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 창이겠구나… 하고 기분이 묘해진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열네살 딸이 두어살 위의 남자 아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 방에 놀러가는 걸 본다면 부모로서는 매우 반대하고 싶어질 것 같다. ㅜ.ㅜ
https://www.annefrank.org/en/anne-frank/secret-annex/

이번에 읽은 건 혜린이 방에 있던 문고본이라 생각난 김에 완역판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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