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살던 시절을 회상하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미조노구치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의 풍경, 혹은 기념일에 설레며 고르던 긴자코지의 케이크 맛 등이 있겠지만 후각으로 표현하자면 나에게 일본은 단연코 습기를 가득 머금은 다다미 냄새. 앞의 두 가지는 기분좋은 기억이지만 후자는 지독한 습기 때문에 늘 곰팡이 걱정을 해야 했던 별로 즐겁지 않은 잔상이다.
해가 쨍하게 뜬 날조차도 빨래가 보송하게 마르는 적이 잘 없는 눅눅한 공기, 거기에 더하는 특유의 다다미 냄새는 어이없게도 다다미가 있을 리 없는 일본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코끝에 밀려오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잡은, 미야베 미유키의 데뷔 30주년 기념작이라는 이 ‘세상의 봄’은 작가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로 음침하고 어두운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보겠다’고 작정한 듯한 장편대작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굉장히 오랜만에 그 눅눅한 다다미 냄새를 맡은 느낌이 들었다.(30주년 기념으로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왜 굳이 쓰고 싶었을까…=_=)
한국의 ‘한’에 대한 이야기는 등골이 서늘하다면 일본의 ‘원망’과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읽는 내내 피부에 습하게 들러붙는 듯해서 읽고나면 영 뒤끝이 산뜻하지 않은데 이 책이 딱 그렇다.
평판이 좋던 청년 번주가 기이한 병으로 돌연 자리에서 물러나 칩거에 들어가고 그 병명이 실은 ‘실성’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이 성주는 때로는 순진무구한 아이가 되었다가 때로는 요염한 여인이 되었다가, 혹은 흉폭한 시정잡배로 변하는데 이건 누군가에게 빙의된 것일까, 아니면 본인의 ‘병’일 뿐일까.
이 작가의 에도 시리즈는 대부분 당찬 여자들이 이야기의 중심에서 활약하지만 다 읽고나면 정작 그녀들의 도움을 받는 ‘남자’들이 참 다양하게 매력있다는(자기 죽을 날을 아는 사람이라든지 몸에 남의 인격이 들어와 있다든지)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이번에 등장한 번주님도 세상 아름다운 외모에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가진 그야말로 탑 속의 공주님.
처음에는 기존의 에도 시리즈처럼 누군가에게 빙의된 번주님에 대한 이야기인가 했는데 뒤로 갈수록 ‘심리학’의 관점에서 흘러가다가 마지막에는 역시나 그냥 ‘멀쩡한 세상 이치’로 마무리하기는 아쉬운지 ‘저주’에 대해 엮어서 이야기는 롤러코스터마냥 요동치고 그 와중에도 성격이 급한 나는 마지막이 궁금해서 몇번이나 맨 뒤로 가서 결말을 읽어내렸는지.(너무 초반을 보다가 맨 뒤로 가면 등장인물도 아직 다 안 나와서 읽어도 어떻게 끝나는건지 모른다는 문제가 있다)
이 작가 책은 늘 그렇듯이 한번 잡으면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에 아무리 두꺼워도 도무지 손을 놓을 수가 없고 정신없이 몰두하지만 아무리 해피엔딩이어도 뒷맛이 쓴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소재가 소재다보니 남녀주인공이 짠 하고 아름답게 맺어져도 이게 과연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일까 싶다.
ps. 그러나저러나 이번 책 표지는 정말 너무… (모님은 보더니 피스타치오랑 체리쥬빌레냐고 하더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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