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일본에 살던 시절을 회상하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미조노구치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의 풍경, 혹은 기념일에 설레며 고르던 긴자코지의 케이크 맛 등이 있겠지만 후각으로 표현하자면 나에게 일본은 단연코 습기를 가득 머금은 다다미 냄새. 앞의 두 가지는 기분좋은 기억이지만 후자는 지독한 습기 때문에 늘 곰팡이 걱정을 해야 했던 별로 즐겁지 않은 잔상이다.

해가 쨍하게 뜬 날조차도 빨래가 보송하게 마르는 적이 잘 없는 눅눅한 공기, 거기에 더하는 특유의 다다미 냄새는 어이없게도 다다미가 있을 리 없는 일본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코끝에 밀려오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잡은, 미야베 미유키의 데뷔 30주년 기념작이라는 이 ‘세상의 봄’은 작가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로 음침하고 어두운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보겠다’고 작정한 듯한 장편대작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굉장히 오랜만에 그 눅눅한 다다미 냄새를 맡은 느낌이 들었다.(30주년 기념으로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왜 굳이 쓰고 싶었을까…=_=)

한국의 ‘한’에 대한 이야기는 등골이 서늘하다면 일본의 ‘원망’과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읽는 내내 피부에 습하게 들러붙는 듯해서 읽고나면 영 뒤끝이 산뜻하지 않은데 이 책이 딱 그렇다.

평판이 좋던 청년 번주가 기이한 병으로 돌연 자리에서 물러나 칩거에 들어가고 그 병명이 실은 ‘실성’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이 성주는 때로는 순진무구한 아이가 되었다가 때로는 요염한 여인이 되었다가, 혹은 흉폭한 시정잡배로 변하는데 이건 누군가에게 빙의된 것일까, 아니면 본인의 ‘병’일 뿐일까.

이 작가의 에도 시리즈는 대부분 당찬 여자들이 이야기의 중심에서 활약하지만 다 읽고나면 정작 그녀들의 도움을 받는 ‘남자’들이 참 다양하게 매력있다는(자기 죽을 날을 아는 사람이라든지 몸에 남의 인격이 들어와 있다든지)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이번에 등장한 번주님도 세상 아름다운 외모에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가진 그야말로 탑 속의 공주님. 🤔

처음에는 기존의 에도 시리즈처럼 누군가에게 빙의된 번주님에 대한 이야기인가 했는데 뒤로 갈수록 ‘심리학’의 관점에서 흘러가다가 마지막에는 역시나 그냥 ‘멀쩡한 세상 이치’로 마무리하기는 아쉬운지 ‘저주’에 대해 엮어서 이야기는 롤러코스터마냥 요동치고 그 와중에도 성격이 급한 나는 마지막이 궁금해서 몇번이나 맨 뒤로 가서 결말을 읽어내렸는지.(너무 초반을 보다가 맨 뒤로 가면 등장인물도 아직 다 안 나와서 읽어도 어떻게 끝나는건지 모른다는 문제가 있다)

이 작가 책은 늘 그렇듯이 한번 잡으면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에 아무리 두꺼워도 도무지 손을 놓을 수가 없고 정신없이 몰두하지만 아무리 해피엔딩이어도 뒷맛이 쓴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소재가 소재다보니 남녀주인공이 짠 하고 아름답게 맺어져도 이게 과연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일까 싶다.

책 볼륨 정말 두껍다;;
이래서 봄에 빌린 책을 지금까지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막상 잡으니 한나절만에 끝.
분량이 이렇다보니 번역자도 편집부도 지쳤던 건가, 번역도 편집도 중간중간 좀 투박해서 아쉬웠다.(개인적으로 이 작가 에도 시리즈는 원래 주로 맡은 번역자의 번역을 좋아해서…)

ps. 그러나저러나 이번 책 표지는 정말 너무… (모님은 보더니 피스타치오랑 체리쥬빌레냐고 하더라만)

6 responses

  1. misha

    표지는 세상달달로맨스 표지인데요(…)

    1. Ritz

      막판에는 남녀 주인공이 지들끼리는 나름 달달하긴 합디다만…( ”)

      일본판 표지는 어땠는지 찾아보니 여러 판형이 나와서 표지는 여러가지여도 대부분 내용이랑 그럭저럭 어울리던데 출판사가 표지 판권까지 돈쓰기 싫었나봐요. -_-
      본인 소설 표지를 저렇게 뜬금없이 만들어도 OK를 해주다니 미유키 여사는 되게 관대한가보다 싶기도 하네요.

  2. 전 그렇게 결말 먼저 찾아보고 중도포기한 책이 너무 많아서 요즘은 꾹 참고 보려고 노력중인데 잘 안되더라구요…(먼산)

    1. Ritz

      사실 마지막을 먼저 보면 이게 계속 볼만할지 그냥 결말만 보고 말아도 될지 각이 나와서… 결말 보고 중도포기한 책이면 어차피 중간도 재미없었을 거예요.

  3. 룬그리져

    30주년 기념으로 그동안 묵힌걸 다 끄집어낸거 아닐까요(….) 묵히다보니 음침하고 어두워지고…

    1. Ritz

      이 작가 다른 작품도 뭐 그렇게 산뜻하지는 않았는데…-_- 그 와중에도 더 어두운 이야기가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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