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바는 어딘가 가버리거나 할거야?”

“그런 건 어른인 당신네들이 해!”
플라스틱 병은 맥없이 목표물을 빗나가 창틀 근처의 벽에 맞아 튕겼다. 날아 흩어진 수많은 알약들을 뒤집어써도, 흰 가운은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듯 미동도 않는다.
“고작 중학생 여자아이에게 전부 뒤집어씌우고서는 아무렇지도 않아! 너희들이 마음대로 시작한 전쟁이잖아! 이리야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다구! 왜 그런 곳에 이리야가 달려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꼼짝도 않고, 무슨 말을 들어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흰 가운이 증오스러웠다.
“반 아이들 중 반은 지금 교실에 있어. 피난으로 결석처리하고 쉬고 있는 애들이 또 반이야, 뭐 어차피 집에서 게임하고 있거나 비디오라도 보고 있겠지! 그런데, 왜 이리야만이 이런, 가슴에 다섯 개나 되는 주사바늘을 꽂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져야만 되는 거냐구!!”
가느다란 손가락이, 담배꽁초를 지붕 기와에 비벼 껐다.
“그렇군.”
아사바의 귀에, 힘없는 중얼거림이 들렸다.
갑자기 흰 가운을 입은 등줄기가 쭈욱 기지개를 펴고, 그제야 시이나 마유미는 등을 돌렸다. 힘이 들어간 눈빛으로 아사바를 바라본다.
“아사바 학생, 저기 말야,”
거기에서 말은 멈추고, 시이나 마유미는 슬리퍼를 신은 발을 처벅처벅 제멋대로 내딛으며 천천히 가까이 다가왔다. 아사바의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아사바를 정면에서 뚫어지게 쳐다본다.
분노는, 어이없게도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아사바는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이제야 서로의 키 차이를 의식한다. 피로의 색이 짙은 얼굴에, 그리고 바로 눈앞에 있는 말라 갈라진 입술에 그만, 도발적인 성적 매력을 느끼고는 쩔쩔맸다. 양어깨에 올려둔 손에 부드러운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살짝 몸이 끌어당겨져,
바위가 내리친 듯한 꿀밤을 맞았다.
단 한방에 몸이 허든거린다. 눈앞이 새까맣게 되고, 목구멍으로 겨자라도 집어삼킨 듯한 자극에 그만 숨이 막혔다.
“죽여버리겠어 어디 감히 아새끼가! 너, 내가 잠자코 듣고만 있을 줄 알았냐!”

일본에서는 4권으로 완결된다고 하는 이리야의 하늘의 세번째 이야기.
이리야의 하늘 3권과 악마의 파트너 3권은 사실 후속권 계약이 완료되지 않은 시점에서 다소 무리하게 진행했다. 다행히 작업 진행 중에 계약서 도착, 소재 도착.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진행하면서 머리 속으로 최악의 경우를 계속 시뮬레이션하면서 작업한 한달이었다. ^^; 그래도 예전과 다르게 세이브 된 원고가 있고 실력이 좋은 번역자들이 있어 최악의 상황도 대처할 수 있다는 건 분명히 1년전과 비교했을 때 감사하기 그지없는 일.

이리야의 하늘 3권은 읽는 것만으로 배가 터질 것 같은 개그 에피소드로 시작해서(정말 교정보면서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 배가 불러오는 기이한 경험을…) 뒤로 갈수록 점점 심각하기 그지없어 지더니 막판에는 ‘최종병기 그녀‘를 방불케 하는 이야기로 다음권을 기약했다.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것은 위의 글에서 보이는 것 같은 캐릭터들의 솔직(?)하고 과격한 면이라고 해야 할까.
흔히 저런 장면에서 소년이 절규하면 어른은 고개를 숙이고 할 말을 잃은 채 반성, 뭐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역으로 ‘죽여버리겠어 어디 감히 아새끼가! 너, 내가 잠자코 듣고만 있을 줄 알았냐!‘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정석을 따라가지 않고 돌발적인 반응들을 보이는 등장인물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 속에서 그들이 제각각 안고 있는 괴로움을 표현하는 작가의 능력은 상당한 듯.
흔히들 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작가의 문장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마음에 드는 점은 이야기를 연출하는 ‘박력‘이다.
과연 4권에서 엔딩은 어떻게 날지 굉장히 기대 중.(설마 최종병기 그녀처럼 다 죽여버리고 끝내진 않겠지. -_-;)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 2권 그 세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