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요근래 뜬금없이 중경삼림이 보고 싶어졌는데, 넷플릭스 신작 리스트에 타락천사가 올라왔길래 올려줄 거면 중경삼림부터 올려주지, 라고 생각했더니 며칠 사이에 대부분의 왕가위 작품이 대기 목록에 올라왔고 오늘자로 열렸다.

내가 작품 속 임청하의 나이를 넘어(당시 41살이었다고) 다시 본 중경삼림은 하나도 낡지 않았고(양조위 속옷은 좀 괴롭더라) 화면은 여전히 스타일리시하며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자주 나왔다.(거의 세뇌 수준인데?)

임청하는 이 작품이 은퇴작이었고 양조위도 한참 젊었던 시절, 금성무, 왕페이는 그야말로 풋풋해서 저 배우들의 아름다운 시절을 새삼 만끽했다. 20세기 말을 산 사람만이 느끼는 진정한 세기말 감성.

사람의 기억이란 믿을 수 없어서, 나는 이걸 분명히 대학 가서 극장에서 봤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찾아보니 94년작, 국내에 95년 9월 개봉이었다고 하니 내가 기억하는 건 타락천사 쪽이었고 이건 고등학교 때 본 모양인데 그 당시에 극장을 자주 가던 편도 아니었는데도 정말로 보고 싶었나보다.(아니면 예전에는 개봉 기간들이 길었으니 수능 끝나고 가서 봤나? 🤔)

왜 극장에서 봤는지 기억하는가 하니, 금성무가 하염없이 파인애플 통조림을 따서 먹는 장면에 극장 곳곳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려왔더랬는데 그 장면을 다시 보면서 그 순간이 생각나더란. 그리고 보는 나도 다시 헉, 했다…
지금 와서 보는 앞 에피소드는 은근 금성무 먹방 영화였다. 파인애플 통조림이 문제가 아니라 내내 계속 뭔가를 먹더라…😑
그리고 영화에서 일본어도 잠깐 썼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30여년이 다 되어가는 작품인데 지금 봐도 왕페이가 입고 있는 옷들은 하나도 촌스럽지 않고 캐릭터는 통통 튀고 양조위는 실연에 어쩔 줄 모르는 둔함의 극치. 저런 엉뚱한 이야기를 어떻게 저렇게 감각적인 화면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왠지 비오는 화이트 데이에 어울렸던 영화.

by

/

8 responses

  1. 낙원의샘

    종로의 코아아트홀에서 아무런 기대없이 영화봤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 양조위도 멋있지만 중경삼림 양조위 첫 등장씬은 정말 끝내주는구나 새삼 느꼈네요.T_T 그땐 넘 어려서 그 오빠의 매력을 십분 이해 못했어요. 쿨럭~

    1. Ritz

      코아아트홀… 뭔가 세월이 느껴지는 장소들이 속속 등장하네요. 저도 거기서 봤던 거 같은데.

      양조위의 매력은 나이가 좀 들어야 제대로 보이나봐요. 그때 보면서 양조위에는 눈이 별로 안 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양조위만 보이더란. 얼마 전 샹치 보니 나이도 멋있게 들어줘서 고마운 오빠. ㅋㅋ

  2. 홍윤미

    오랜만에 나도 다시 봐야겠다! 언제 봤는지는 기억 안나지만..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 중 하나.. 내용은 잘 기억도 안나지만 음악과 색채와 배우들의 눈빛이 어우러져 몽롱한 겹겹의 샐로판지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는 영화 ㅠㅠ

    1. Ritz

      내용은 아마 별 내용이 없어서 기억이 안 나는 걸 수도 있어. ㅋㅋ
      음악이랑 화면이 너무 강해서 내용이 묻히는 게 아닐까 싶더라. 나도 어제 다시 보니 특히 앞 에피소드는 아, 저런 내용이었구나 하고 처음 보는 영화 같더라고. ( “)

  3. 난다

    아 오랜만에 다시 봐야겠네요.저는 저 영화 고등학교때 너무 좋아해서 두번인가 세번 가서 봤어요.같이 버스 타고 가며 수다 떨었던 친구,씨네시티 가던 길 ,키요라 게딱지 간판보고 웃던 기억까지 고스란히 남았는데 그게 벌써 근 20년전이라니 ㅠ 왕페이의 몽중인과 reality bites ost의 my Sharona 그 두 곡은 들으면 그 맘때 기억이 떠오르며 맘이 찡한 거시기가 있어요 내 청춘 돌리도~~~~~

    1. Ritz

      나이 먹어 다시 보면 좀 유치하지 않을까, 했는데 오늘 다시 봐도 좋더라고요. (그리고 다시 봐도 저 왕페이 캐릭터는 참으로 시대를 앞서간 도라이….) 저 포스터도 오랜만에 보니 지금도 멋있고.
      근데 이상하게 저 다음에 나왔던 타락천사는 내용도 기억이 잘 안 나고 저 영화만큼 정이 가지 않더라고요. 몽중인이나 캘리포니아 드리밍 같은 기억에 남은 곡이 없어서 그런가. 저런 스타일은 한번으로 끝냈어야 멋있는 거였나 봉가.

      몽중인은 역시 왕페이 버전이 원곡자 곡보다 더 좋음. ^^

      리얼리티 바이츠. 제목 진짜 오랜만에 듣네요. ㅋㅋ 위노나 언니 그때 진짜 잘 나갔는디…

  4. 룬그리져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DVD사서 보다가 귀찮아서 구글 무비에서 다시 구입했는데, 나중에 BD 나온건 못 사서 좀 아쉽긴 하네요. 전체적으로 영화 자체의 재미도 있었지만 음악쪽이 너무 많이 뇌에 남아서 (진짜 모든 곡이 다 좋았습니다) 더 기억에 남네요.

    1. Ritz

      지금 다시 봐도 여전히 개성있더라고요. 저도 음악을 더 좋아해서 OST 사서 정말 많이 들었는데 오늘 영화를 다시 보니 내용은 생각보다 많이 기억을 못하고 있었더라고요…( ”)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