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 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가끔 유행가 한소절이 머리에 철썩 들러붙어서 당췌 떨어지지를 않는 때가 있는데 요며칠동안은 뜬금없이 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이라는 시구가 들러붙어서 웽웽거려 간만에 찾아봤네요.

중2때쯤 교과서에 실렸었던 것 같은데 저 시 말고도 몇가지가 더 있었는데도 그맘때 감성에 저 시가 참 마음에 들었더랬습니다. 근데 시험문제로는 잘 안 나왔던 듯. –;

시는 역시 *행에서 *행까지는 *** 이런 분석 없이 그냥 읽고 그 자체로 감상하는 게 제일 좋아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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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esponses

  1. 시 하니까 고등학교때 국어 선생님께서 시 한 편씩 외워오라는 숙제를내주셨는데 한 친구가 안 외워왔다가 부름을 당하자 일어나서 구지가를 외우고 운률대로 몽둥이를 맞았던 아름다운 추억이 떠오르네요. (아득한 눈빛)

    1. 리츠코

      아니, 구지가는 시가 아니랍니까. -ㅁ-
      그래도 짧아서 많이는 안 맞았겠네요.( ”)

  2. 미사

    엥? 그때는 중학교 교과서에도 이런 시가 실렸소?
    우리 때에는 아마 남녀상열지사 -_- 라고 해서 이런 시가 실리려면 택도 없었을 듯…
    하도 더우니까 <눈 쌓인>이란 대목에 괜히 꽂히는 걸 보니 난 너무 메말랐나봐 -_-

    1. 리츠코

      언니 때는 없었나요? 저희 때는 유일한 남녀상열지사를 노래한 시였어요…( ”) 사실 그때도 읽으면서 왠일로 이런 시가 교과서에? 라고 생각했었네요.

      오늘부터 또 더워지려나봐요. 정말 저 시가 갑자기 생각난 게 눈 쌓인 어쩌고 때문이었나 싶기도 하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