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도노휴의 ‘더 원더’를 재미있게 봐서 빌린 책. 번역은 더 원더 쪽이 나았다.

2008년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났던 밀실 감금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

7년 전, 열아홉 살 소녀가 한 남자에게 납치당해 헛간의 작은 방 안에 갇힌 채 그 안에서 납치범의 아들을 낳는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방 밖으로 나가 보지 못한 채 다섯 살 생일을 맞는 잭. 그에게는 엄마와 작은 방만이 세계의 전부였다.
잭의 엄마를 납치했던 올드 닉은 잭이 성장함에 따라 그에게 점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엄마는 틈만 나면 탈출을 시도하려 한다.
결국 잭이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잭이 방 밖으로 탈출하여 두 사람은 구출되고 올드 닉은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밖으로 나온 이후 엄마와 잭은 텔레비전에 나올 정도로 유명해지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안락한 공간을 허락해주지 않는다.
점점 바깥 세상에 적응해가지만 잭은 ‘방’이 그립기만하다.

감금에서 탈출까지만 놓고 보면 여느 범죄 드라마의 에피소드 중 한 편 정도로 지나갈 소재인데(생각해보니 2008년 즈음에 범죄수사물에서 저런 에피소드가 유난히 많았던 듯), 작가는 책 전체에서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도 자극적으로 그리지 않는다.(이 책에서 가장 자극적인 장면을 꼽자면 방에 갇혀있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바깥으로 나와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아닐까.)

상상만으로도 암담한 처지에 놓인 두 모자의 ‘생활’과 ‘감정’을 차분하게 묘사해서 처음에 읽기 시작하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할 정도.
아이에게 헛된 희망을 주지 않고 현재의 상황에서 즐거움을 찾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그 쳇바퀴 돌듯 갇힌 생활에 어느 순간 읽는 사람조차 숨이 막혀오기 시작할 즈음, 드디어 탈출은 이루어지고 모자는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탈출 이후에 기다리고 있는 건 이상적인 ‘해피엔딩’이 아니라 7년을 사회에서 격리됐던 성인 여성과 태어나서 한번도 햇빛을 직접 쬔 적 없는 5세 아이의 세상 적응을 위한 고군분투.

직업이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일도 하면서 살기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 안에 있을 때 나랑 엄마한테는 모든 것을 할 시간이 있었다. 시간은 버터처럼 길과 집, 놀이터. 가게, 온 세상에 아주 얇게 펴져 있어서 한곳에 아주 조금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서둘러 다음 장소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다.

p.458

네 살 때는 텔레비전에 있는 모든 것이 그냥 텔레비전인 줄 알았지만, 다섯살이 되자 엄마는 텔레비전 안의 많은 것들이 진짜라고 알려주었다. 한데 이제 바깥 세상에 나와보니 그중에 많은 것들이 진짜가 아니었다.

p.441

책은 때때로 ‘엄마’의 존재가 흐릿할 만큼 철저하게 아이 잭의 시점으로 쓰여져서 오히려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태어나서 서서히 세상을 배워나가도 아이에게는 매일이 새로운데 다섯살이 되어서야 갑자기 나온 세상은 얼마나 무섭고 생소할지.
잭에게 바깥 세상은 앨리스가 떨어진 토끼굴과 다를 게 없고 막연하게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도 알 것 같지만 필사적으로 그곳을 빠져나온 엄마에게 아이의 이런 마음은 그저 무섭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터.
두 모자의 마음의 곡선은 그들이 도망나온 ‘방’에 대한 기억이라는 포인트에서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하고 아이를 다시 세상에서 데리고 나온 게 엄마였다면 그 엄마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온전히 작별할 수 있도록 용기를 낼 수 있게 만든 건 아이라는 이야기 구조가 너무 좋았다.

당연히 영화로 나왔을 것 같아 찾아보니 2016년에 국내 개봉도 했었고 영화 평도 좋은 편. 무명에 가까웠던 브리 라슨이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받았는데 이상하게 어느 OTT에도 안 올라와 있다. 넷플릭스의 ‘더 원더’가 뷰 수가 잘 나오면 이것도 올라오려나.

+오늘 상담 가서 이야기하다가 이 책 이야기를 했더니 선생님이 듣다가 ‘아이가 3세면 괜찮을텐데 5세면 아무래도 후유증이…’라고 해서 저 직업도 미디어를 마음껏 즐기기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2.16)

by

/

2 responses

  1. 영화에서 아이 연기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탈출하며 트럭에 실려 처음 하늘을 보던 아이의 표정을 보며 어떻게 저런 표정을 연기할까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원더의 Auggie 역을 한 아역배우가 더 어릴 때 찍은 영화예요.

    1. Ritz

      그렇게 말씀하시니 영화가 더 궁금한데 왜 올라온 곳이 없을까요. ㅠ.ㅠ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