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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집주인인 노비에게 구박당한 양반’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 주인공 또한 노상추였다. 과거에 낙방한 후 채우라는 친구의 여종 비자의 집에 머물렀는데, 어찌나 구박하는지 밥도 제대로 안 줘 배고프다는,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는 내용을 일기에 남겼다. 당대의 수많은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제아무리 과거에 급제해 임금 곁에서 국사를 논하더라도, 한양에서 집을 사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노상추처럼 대부분의 관리가 사직 후 생활비 많이 드는 한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던 이유다.

「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 p.55

요근래 이상하게 이 이름을 여기저기에서 자주 접했는데, 이름도 특이하거니와 이 사람 고향이 내 고향 근처(같은 선산善山 사람이었음)라 좀더 머리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며칠 전에 드디어 알고리즘의 힘으로 유튜브 추천 영상에 이 제목이 보였다. 😑

다큐멘터리에서는 무과 시험의 활쏘기가 명중률보다는 멀리 쏘는 걸 중시했다는 점, 과거에 붙어도 인맥이 없으면 자리를 잡기 힘들었다는 점 등등이 눈에 들어왔다.

17세 때 아버지의 명으로 쓰기 시작해서 84세로 죽을 때까지 일기를 썼는데 (17세 때 쓴 것은 남아있지 않다고) 그 기간이 60갑자를 한바퀴 돌고도 몇 년이 남으니 노상추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량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의 생활상, 사회상, 기후 등등을 꽤 자세히 알 수 있을 법하다. 게다가 시험 보겠다고 지방에서 서울로 오르락내리락해서 그 기록 또한 의미가 클 듯.
선산에서 한양까지는, 나 어릴 때 명절에 오르내리던 걸 생각하면 차로도 4-5시간 걸리고 막히면 8-9시간도 우스운 거리라 보면서 좀더 실감나게 와닿았다.😶(저 시절에는 일주일 걸렸다고 하던데 말도 타서 그런가, 의외로 빨리 갔더라…)

노상추는 일기에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서도 문안 온 사람들의 이름을 전해 듣고 일기에 적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 노상추 일기

그걸 왜 적어…😑 (부록으로 문상온 사람 이름도 붙여놨으면 완벽했겠네;;)

二十七日戊寅, 大旱. 聞太守設僧尼巫祝;盲祈雨云. 聞府東北熊谷面一村, 有南哥沈
哥爲隣者, 南沈兩人之子, 往後山逢虎, 四子盡纖而還矣, 四五日後, 南哥名容者適出外
未返, 而大虎下山直入沈家, 殺大牛而不食, 毁破醬甕釜鼎等物, 又作南家直入內房, 殺
妻與婦;二女;一子, 又殺一僧;一砲手. 又入房而臥不出, 自官分付別砲手捉虎, 其長耳下
一把一;云.(盧尙樞日記 1 英宗四十年甲申日記 五月小 二十七日 戊寅)

27일 크게 가묾. 태수가 중과 무당, 북치는 소경을 불러 기우제를 지냈다고 들었다. 부의 동북쪽 웅태면의 한 마을에서 남씨와 심씨가 이웃해 있었는데 두 사람의 아들이 뒷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네 아들이 모두 다쳐서 돌아왔으며 사오일 후에 남용이라는 자는 마침 외출하여 돌아오지 않았는데, 큰 호랑이가 산에 내려와 바로 심가네 집으로 들어가서 큰 소를 죽였으나 먹지 않고 장항아리와 솥 등의 물건을 부쉈으며 또한 남씨 집에는 바로 안방으로 들어가 부인과 여인, 딸 둘과 아들 한 명을 죽이고 또 중 1명과 포수 1명을 죽였으며 또한 방에 들어가 누워서 나오지 않으니 관가에서 포수에게 특별히 분부하여 호랑이를 잡도록 하였는데 그 귀 아래의 길이가 한 웅큼이나 되었다고 한다.(노상추일기 1 1775년 5월 27일)

[네이버 지식백과] 노상추일기 [盧尙樞日記]

과연 빠지지 않는 호랑이 이야기….

68년을 꾸준히 일기를 쓴 사람이니, 다른 건 몰라도 성실함 하나만은 인정할 만한데 그래서 뒤늦게 과거에 급제하고도 기반도 없는 사람이 그럭저럭 평탄하게(본인은 인정 못 할 것 같지만) 인생이 풀리지 않았을까.

어제던가, 타임라인에서 조선시대에 양반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금 사람들은 다 자기 조상이 양반인 줄 안다는 글을 봤었는데 적어도 집안에 저런 일기 하나쯤 있어야 진짜 조상이 양반이었구나, 할 수 있지 않을지.😀(조상이 양반이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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