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아무래도 북한의 작가라서 그렇게 많이 소개되는 편이 아니었고(요즘에는 교과서에도 많이 실려있는 모양) 나도 어쩌다 알게 된 몇몇 시들이 마음에 들어 관심이 있는 정도였는데 마침 얼마전에 시집 ‘사슴’도 샀고 비밀독서단을 보다가 백석을 사랑하는 작가가 직접 쓴 평전이 나와있다길래 이번에도 도서관에서 대출 완료.

할머니할아버지가있는 안간에들뫃
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내음새가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내음새도나고
끼때의두부와 콩나물과 뽁운잔디와고사리와
도야지비게는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여우난곬족」 중에서

선굵은 외모에 완둣빛 더블버튼 양복을 쫙 빼입고 결벽증에 가까울만큼 깔끔지고 예민했으며 양말조차 가능하면 고급진 걸로 골라 신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그가 발표한 시들은 포스트모던하거나 현대적이어야 할 것 같은데 어울리지 않게(마치 잘 빼입은 정우성이 트로트 부르는 걸 보는 듯)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같은 시보다는 작가의 고향 평안도 사투리들이 그대로 살아있는 토속적이고  푸근한, 먹방 시라는 장르가 있다면 이 작품들이 아닐까 싶을 만큼 맛깔나는 음식 묘사가 두드러지는 시를 많이 남겼다.

대화방에서 개굴님이 뮤지 닮았다고 한 후로 계속 그렇게 보여 괴롭다. -_-
대화방에서 개굴님이 뮤지 닮았다고 한 후로 계속 그렇게 보여 괴롭다. -_-

월북작가라기보다는 ‘원래 북한에 살던 사람이라 굳이 남한으로 내려올 필요도 동기도 없어 남았다가 그쪽에서도 처지가 곤란해지고 결국에는 어느 쪽에서도 한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게 안됐고, 그 시절 대부분의 작가들에 비하면 차라리 작품활동을 잠시 접을 지언정 일본에는 협력하지 않았을만큼 결벽적인 지조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면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건 안타깝다.

생애에서 시인으로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딱 6-7년 정도였고 그 사이에 낸 작품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뛰어나서 지금의 백석에 대한 이미지는 그 몇년에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인데(그래서 마치 요절한 시인 같은 느낌이지만 정작 본인은 85세까지 꽤 장수하셨다) 시절이 좀더 받쳐줬다면 얼마나 괜찮은 시들이 더 나왔을까 아쉽기도…

백석에 대해 내가 막연하게 가진 정보는 당시 꽤 잘 생긴 모던보이였고 그 당시 그 족속들이 그러하듯 집안에서 권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도 자야 여사와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남긴 시인 정도였는데 이번에 이 평전을 읽다가 제일 깬 건 아무리 그 시절이 다 그랬다지만 부모가 권하는 여자랑 한 결혼만도 두 번이고 그 뒤로도 두 번이나 더 해서 결혼을 무려 네 번이나 했었더란. 작가의 시적 감수성 운운하기에는 저 사람 시 중에는 사랑 시도 별로 없잖아? -_-(이 부분에 대해서는 팬심 가득한 작가조차 쉴드를 못 치더라)

나라(奈良)에 오니 사슴이가 참 많소. 백(白)사슴을 보고 누구를 놀니고 싶었는지 알겠오?

아침에 시가로 나가 ‘사슴군’ 계신가고 학교로 전화를 걸었더니 벌서 일주일 전에 상경하셨다니 우리가 셋이서 싸단일 때 그는 어느 구석에서 망원경으로 다 살피지 않았으리오.

소설가 최정희, 시인 노천명, 모윤숙 등과 꽤 친하게 교류하며 지냈는데 그네들이 주고받은 서간을 보면 세 여자가 백석을 ‘사슴군’이라 부르며 가열차게 깠다가 농담을 했다가 하는 게 요즘 시절의 남자사람친구, 여자사람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인상적이었다.(그러게… 내 메신저 대화방에도 개구리도 있고 해파리도 있고 펭귄도 있고…) 이 평전 작가도 이야기했듯이 저들의 대화를 보고 나니 노천명의 ‘사슴’은 과연 그냥 ‘사슴’이었던 걸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다 읽고나니 작가의 시에 대해서는 좀더 풍부하게 알 수 있어 좋았고 작가에 대한 환상은 참 깔끔하게 깨진 책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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