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린양 캠프 3일째.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멘붕 와서 집에 오면 울면서 안 간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의외로 첫날부터 덤덤.
내내 뭐 만들고 놀이하는 캠프라서 재미도 있었단다.

첫날의 린양 소감은
1. 말이 빨라 못 알아듣겠다
2. 그리고 내가 말해도 못 알아듣는 것 같다.(…)
3. 그 와중에 친구는 둘 사귀었는데 한명은 다른 동네에서 온 것 같다는 줄리아양과 일본인 루카양.

캠프 보내는 중에는 아침, 점심 도시락을 싸줘야하는데 여기는 어떤 식인지 잘 몰라서 첫날에 아침으로는 과일, 점심으로는 주먹밥을 작게 만들어 싸주면서 다른 친구들은 뭘 가져오는지도 좀 보고 오라고 했는데 다녀온 린양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점심에 루카는 사과 몇쪽, 줄리아는 김 한봉지(무려 한국산 광천 올리브김이었단다. 국산 김의 위엄? -_- 줄리아가 린양한테 포장지 읽어달라고 했다고…)였다며 여기 애들은 점심 안 먹고 사나보다며….

첫날 주먹밥 만들어 보내면서 보니 비주얼이 영 그래서 지난 주말에 집 근처 마트 갔다가 일본식 참치 김밥을 보고 저런 식이면 괜찮겠다 싶어 화요일부터는 근처 마트에서 산 일본 마끼용 김으로 속을 하나만 넣은 일본식 김밥을 만들어 보내고 있는데 줄리아양이 본인 점심이 모자란 거 같아(당연히 모자라겠지) 몇개 나눠먹었더니 오늘은 급기야 린양이 먹기 부족할 정도였다길래(어머님 뭐하시니…) 내일은 남의 집 자손 밥까지 내가 넉넉히 만들어 보내야하는 건가 고민 중. -_-;;;

첫날보다는 둘째날이, 그리고 어제보다는 오늘 더 많이 알아들은 것 같고 말도 좀더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린양의 자평.(하루에 6시간씩 벌써 18시간째야…) 그 와중에 친구들이랑 이야기라도 하고 노는 게 신기해서 ‘무슨 이야기 하고 노냐’고 나랑 옆사람이랑 번갈아 물어대니 린양은 귀찮은지 ‘그냥 잡담이지 뭐~’ 하고 만다. 아니 애미애비는 니가 영어로 뭔 잡담을 하는지가 궁금한 거라고…

그 와중에 40년 가까이 살면서 몰랐던 나의 새로운 일면은 나는 정말로 시차가 벌어지면 쥐약이었다…;
옆사람도 린양도 하루이틀만에 멀쩡한데 정말 꼬박 어제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골골대다가 오늘에서야 좀 사람 꼴 갖추고 정줄 잡은 중. 여전히 소화도 잘 안돼서 밀가루 음식은 피하고 싶어 집에서 밥 해먹고 살았더니 여기가 서울인가, 버클리인가…


린양 캠프 가는 길에 보이는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예쁜 집!

어쨌거나.
출국하기 좀 전에 운전 연수가 끝난 다음날인가, 반년 정도 얼굴도 거의 못본 동네 엄마에게 불쑥 ‘요즘 운전 연수 받는다며~ 연수 선생님 괜찮으면 소개 좀~’이라는 전화를 받고 뭔가 내가 밖에 나가지 않아도 나에 대한 소식들이 알아서 돌고 있다는 피로감이 확 밀려온 일이 있었는데 어제였던가, 린양을 데리러 집을 나섰는데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하나 같은 모양이 없는 나즈막한 집들이 모인-마치 심즈 안의 어느 거리 같은 길을 걷고 있자니 굉장히 오랜만에 옛날 일본에서 살 때 느낀 그 특유의 이방인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그게 참 익숙해지지 않는 외로움? 같은 감정이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힐링’ 같이 다가와서 나 알고보니 좀 히키코모리 계열의 사람인건가 싶기도.

어제는 린양을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할머니가 별일없이 반갑게 ‘Hi~’ 하고 인사를 하시는데 나는 아직까지는 차마 머리 허연 할머님께 똑같이 손 흔들며 ‘Hi~’하기가 쉽지 않아 그냥 웃으며 고개만 약간 숙여 인사하고 지나왔다.

오늘은 처음으로 옆사람 옆에 태운 채로 린양 캠프까지(도보 15분, 차로 5분…) 운전.
아직 익숙하지 않은 네비게이션과 교통표지판 덕에 가는 길도 돌아오는 길도 두배쯤 더 걸렸다.
여기는 너무나 신호등 없이 표지판만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마치 차를 자전거 몰듯 몰고 다니는 느낌. 익숙해지면 편할 것 같긴 한데 한국 돌아가서 운전할 때 전혀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다…;

낮기온이 18도까지 올라가서 나가니 마치 초가을 느낌.
1년 내내 이 정도 기온이라면 정말 살기 좋을 것 같다. 걸으면서도 ‘아, 오늘 날씨 정말 좋네’라는 말을 몇번이나 했는지.

b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