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1.

이번 학기에는 유난히 짝 운이 좋은 듯하던(계속 여자 짝이었음) 린양이 드디어 이번에는 남자 짝과 앉게 되었다. 보통 뽑기 같은 방법으로 랜덤하게 정하는데 이번에는 선생님이 직접 자리를 미리 정해서 발표하신 걸로 봐서는 뭔가 의도가 있으신 것 같고, 린양은 올해 전학 온 남자아이가 걸렸다고.
그래도 첫날은 별로라고 툴툴대면서도 그동안 짝이 잘 걸렸던거지, 하더니 하루하루 지날수록 불만이 하늘을 찔러서 가만히 들어보니 새 짝은 공부에 별 뜻이 없는 청춘인지 준비물, 숙제 등등 거의 챙겨오는 게 없는 데다가 수시로 지우개고 연필이고 맡긴 마냥 가져가서 쓰고, 수업을 하나도 안 듣고 있어서 매번 어디를 하고 있는지 알려줘야하는 게 영 귀찮다는 게 린양의 이야기.
며칠전에 미술시간 준비물로 낙엽을  20장 주워가야 했는데 역시나 짝이 낙엽을 한장(줍는 김에 몇장 더 줍지 그랬냐…) 가져와서 선생님이 나눠주라고 하셨다며 그게 불만이길래 ‘세상에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있는 거고, 너도 그러면 좀 나눠주지 그랬냐’ 했더니 불쑥 한다는 말이 ‘아, 정말 부조리해!‘ 란다.(부조리는 또 어디서 주워들었냐)

니가 진짜 부조리가 뭔지 알아?

세상은 원래 뭐 그렇게 조리있게 돌아가지는 않아, 라고 했더니 린양 말의 요점은 귀찮은 것도 싫지만 선생님이 짝한테 분명하게 주의를 주지 않는 게 불만이라는 거다.
린양 올해 담임 선생님은 좋은 의미로 작년의 담임 선생님과 정확히 정 반대편에 있을 법한데(연륜있고 꼼꼼하신 데다가 소풍 때라든지 알림장을 보면 굉장히 효율적으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 지시해주시는 편) 내가 보기에 작년 선생님처럼 교사로서의 순수한(?) 열의에 불타서 반 전체 학생을 모두 끌고 가겠다! 하실 것 같지는 않은 타입. 그래서 아마도 별 사고치지 않고 수업에 관심이 없는 정도라면 크게 지적을 하지 않으실 것 같긴 하다. 이걸 애한테 설명하기는 뭐하고 그냥 적당히 ‘선생님이 니가 그래도 그나마 챙겨줄 거 같아 짝으로 앉히셨나보지’ 하고 넘어갔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린양이 외친 ‘부조리’가 너무 웃겨서 무심코 한번씩 웃는다.

#2

지난주에는 학예 발표회가 있었다.
이 학예 발표회라는 것도 교장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계속 바뀌고 있는데 이 학교가 소위 정년 얼마 안남은 교장선생님들이 안락하게(…) 지내고 가는 곳으로 찍혀있는지 입학했을 때 계셨던 공모제로 뽑았다던 교장선생님이 정년이 차서 나가시고 나니 그 뒤로 들어오는 교장선생님 임기들이 1년, 1년반 이딴 식이라 정신이 없다.

1, 2학년때는 강당에서 6시부터 한 3시간쯤 온동네 조부모까지 다 모이는 규모로 전체 발표회를 했었는데 작년에는 같은 시간에 그리 크지 않은 시청각실에서 이틀에 나눠 진행했고 올해는 같은 장소에 공연 시간을 아예 4시로 당겨서 진행한다고 알림이 왔다. 시간이 너무 일러서 맞벌이 부모들은 난감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가서 보니 확실히 작년보다 덜 붐비는 느낌. 대신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 공연을 보러 온 아이들이 꽤 있었다.

린양 발레하는 걸 촬영하려고 앞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옆에 비어있는 자리에 린양 또래 남자아이 둘(아무래도 같은 학년일 것 같아 물어보니 맞더란)이 굉장히 깍듯하게 빈 자리냐고 묻더니 자리 잡고 앉았다.
발레 공연이 저학년팀/고학년팀으로 나눠서 있었는데 남자아이 중 한명 여동생이 1학년이라 앞쪽에 공연을 했던 모양.

제법 점잖게 고학년팀 공연까지 보더니, 나는 끝나고 린양 옷이랑 챙겨주러 가느라 막 일어서려고 하는데 옆에서 한 녀석이 굉장히 진지하게 “발레복이 (밝은 색 아닌) 검은 색도 괜찮다~” 하니 옆의 녀석도 “그러게 그러게” 하고 맞장구 치는 걸 듣고 귀여워서 속으로 빵 터졌다. 뉘집 아들인지 깨알같이 섬세하신데 지나고 나니 궁금해서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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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sponses

  1. 검은색 발레복 예쁜데 애들한텐 인기가 없는듯…(쿨럭) 보통 핑크 보라 정도던데 한동안 엘사덕인지 파랑도 제법 보이더라구요.

    1. Ritz

      린양은 작년부터 검은색 사달라고 하더라고요. 한 3학년은 넘어야 어두운 색이 눈에 들어오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