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보고 싶었던 영화 두 편이 넷플릭스에 나란히 올라왔길래 연달아 하나씩 봤더니 같은 감독의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라 그런가, 긴 장편 영화 한 편 본 듯하다.
감독은 어쩜 이렇게 각자 서로 다른 방법으로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들을 찾아냈을까.

두 작품 다 화려하지 않은 화면과 잔잔한 연출로 오로지 연기자들의 명연기에 기대어 인물에 집중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점도 좋았다.

‘박열’은 박열과 후미코의 그 시대 사람들이라고 믿어지지 않은 ‘힙한 사랑’이 영화의 가장 큰 개성이었고 단순히 독립 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왜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마치 무언가에 취하듯 서로에게 빠져들고 거침없이 한 곳을 향해 분노의 칼날을 향하는가, 에 대해 풀어나가서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특히나 가네코 후미코 역은 최희서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일본인이 구사하는 한국어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찾아보니 모든 한국어 대사를 카타카나로 바꾼 뒤 그대로 외워버렸다고.

‘동주’는 내가 ‘윤동주 평전’을 먼저 봐서 아무래도 그 책을 가감없이 영화화한 느낌이라 중반까지는 좀 평이했는데 마지막에 윤동주와 송몽규가 진술서 사인을 앞두고 교차하는 장면에서 결국 울컥하고 말았다.

평전을 읽다보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앞서가고 재능이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윤동주 평전인데 어째 이쪽이 더 위인으로 보일 정도. 그럼에도 이 책을 다 읽고났을 때 여전히 윤동주에 더 애정이 가고 공감하게 되는 건 보통의 우리는 누군가보다 한발짝 뒤쳐지는 것에 고민하는 경우가 더 많고, 그래서 그가 마지막까지 행동보다는 시로 남긴 고뇌와 망설임, 죄책감이 더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박열’이 뒤로 갈수록 어느샌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영화라면 동주는 반대로 흑백의 화면이 주는 잔잔함 속에서 마지막에는 서서히 내 안으로 잠겨드는 작품이었다.

너희들이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는 이유가 뭔지 아나?
그것은 열등감 때문이지.
비열한 욕망을 숨길 자신이 없어서 명분과 절차에 기대는 거지.

이 두 영화에서 네 명의 젊은이들을 대하는 일본의, 야만을 어설프게 포장하고 끊임없이 ‘서구의 방식과 절차’에 신경을 쓰고, 세계의 중심에 서고 싶은 욕망과 그에 비례하는 열등감을 가진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두 작품을 연달아 봤더니 겹치는 캐스팅이 많아서 좀 웃기긴 하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