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8년 전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하멜 책을 샀었는데, 보통 산 책은 바로 다 읽는 편이건만 그러고 무슨 변덕으로 읽지 않고 구석에 처박아뒀던 걸 어제 ‘책 읽어드립니다’ 프로에 하멜 표류기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난 김에 도로 꺼냈다.

하멜이 조선에 억류됐던 기간은 13년, 그동안의 기록이라 길고 장황할 것 같아 미뤘던 것 같은데 막상 잡으니 초반에 조선에 도착하기까지, 그 뒤로 조선의 형편에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시점까지는 꽤 상세하게 기록했으나 그 뒤로는 한 해에 한 페이지 남짓밖에 안 돼서 한 나절만에 후르륵 끝냈다.

다 읽고나니, 이 책 의외로 재미있다.

글을 쓴 목적이 ‘나 이렇게 고생했으니 밀린 돈을 주시오’ 이기 때문일까,(그래서 다소 과장된 면도 있는 듯하다지만) 고생한 부분들은 세상 절박하고 처량하게 적어놔서 제주 해안으로 쓸려와서 광해군의 유배지에서 머무르다 산 넘고 바다건너 서울까지 이동하는 과정이나 십여년 생활에 어렵게 모은 돈으로 비밀리에 배를 사서 주변에 들킬까봐 돛도 내리고 노를 저으며 일본으로 탈출하는 하멜 일행의 모습은 쇼생크 탈출만큼 처절하고 눈물겹다.

하멜이 머무른 시기는 효종~현종 시대.
가장 길게 산 지역은 전라도였는데, 이들의 삶의 질을 좌지우지하는 전라도 좌수사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부패한’ 좌수사가 쫓겨나는 빈도수가 너무 잦아 읽다보면 어떤 의미로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엉망이었구나 싶다. -_-;

중간에는 자신이 본 조선에 대한 정치, 문화 등등의 정보를 꽤 많이 정리해뒀는데 내가 어딘가 외딴 곳에 떨어졌을 때 그곳에 대해 이 정도로 많이 알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세세해서 놀랍다.(사실인지 다소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다고는 하지만)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예전에 읽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보다 더 머리에 잘 들어오는데 이쪽은 아무래도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한 필사적인 작업이어서일까…-_-;

어찌보면 하멜은 미묘하게 타이밍 나쁘게 조선에 표착한 사람이었다.
하멜보다 수십년 먼저 조선에 표착했던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박연)는 조정에서 부산의 왜관으로 보내 처리하려고 했으나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일본 입국을 거절당하고 그대로 조선으로 귀화한 후 조선의 병력 발전에 기여하고 있었는데, 하필 하멜이 도착한 시기의 왕 효종은 북벌 준비를 하던 중이라 벨테브레이처럼 하멜이 조선의 무기 발전이나 병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효종은 하멜에게 “이방인들을 이 땅에서 떠내 보내는 것은 이 나라의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평생 살아야 하며 대신 너희를 부양해주겠다”(부양해주겠다고는 했지만 ‘잘’ 부양해주겠다고는 안 했음. 적어도 효종은 본인의 사비로라도 챙겨줬는데 현종 때부터는 방치돼서 하멜 일행은 언제부터인가 조선에서 구걸이 그렇게 창피한 일이 아닌 모양이라며 부족한 것들은 구걸로 채우기도 했다고. 하얗고 눈도 파란 사람들이 길에서 구걸하면 신기해서 수입은 좋았을지도..? -_-)고 했다는데 도착했을 당시 왕이 효종이 아니었다면, 하다못해 그 다음 현종이었다면 아마도 하멜이 그토록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부르짖었던 ‘낭가사께이(나가사키)로 갈 수 있지 않았을까.

1666년 하멜은 그토록 바라던 나가사키에 도착하고 도착 당일 일본 정부의 조사를 받게 된다.
일본은 하멜의 국적과 소속, 조선에서 보고 들은 모든 정보를 캐내는데 당시 하멜이 일본에게 받은 54가지 질문을 읽다보면 타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을 미리 조사할 때 필요한 매뉴얼이 이미 준비되어 있던 일본과 일본에서 나머지 네덜란드인의 송환 요청 및 항의를 받을 때까지 하멜(및 벨테브레이)의 국적이 어디였는지도 모르는 조선의 온도차에 새삼 갑갑해진다. -_-

기존에는 ‘하멜 표류기’라고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 이 책은 하멜 본인이 회사에서 그동안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쓴 보고서라 원제는 「야하트 선 데 스페르베르 호의 생존 선원들이 코레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켈파르트 섬에서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한 후 1666년 9월 14일 그 중 8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겪었던 일 및 조선 백성의 관습과 국토의 상황에 관해서」(제목 길게 짓는 게 요즘이 첫 유행이 아니었나봄), 혹은 「1653년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불행하긴 했지…) 였다고 하니 표류기보다는 내가 읽은 책 제목처럼 ‘보고서’가 더 어울릴 듯하다.

내가 읽은 ‘하멜 보고서’는 이미 절판.
다른 버전도 있으면 읽어볼까 싶어 검색하니 인터넷 서점에 2월에만 하멜 표류기 신간이 3권 등록되어 있다. -_-; 과연 매스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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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sponses

  1. 책보다 서평 ㅎㅎ 느무 재미있게 읽었네요

    1. Ritz

      책도 얇아서 부담없고 재미있어요. ㅋㅋ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조선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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