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나 법을 파괴하고 도리를 초월하며 파괴의 의지를 이곳에 표하는 자가 되어
벨타 에임 쿠이퍼 쿠이퍼! <마그나·블라스트>―이그지스트!”

카도카와에서 계약서가 한차례 오고, 미디어웍스에서 한차례 추가 오퍼가 정리되고 나니 요즘은 그럭저럭 신간을 교정보는 맛이 생겼다. 그동안 계속 속간들만 작업을 하다보니 어느 정도는 타성에 젖었는데 신작들을 보는 것도 분위기 쇄신에는 생각보다 크게 도움이 되었다.

교정을 보다보면 정말로 카도카와 계열과 미디어웍스 계열의 성향이 확 갈린다. 이전에야 카도카와 작품이라고 해봐야 풀 메탈 패닉!과 오펜 뿐이었으니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 12월의 베로니카, 그리고 스트레이트 재킷까지 읽으면서 ‘후지미 계열‘의 성향이라는 게 약간은 보였다. 뭐 그래봤자 지극히 일부분이겠지만.

그야말로 ‘라이트‘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격문고에 비해 이 후지미 작품들은 다분히 ‘고전적‘이다. 어느 정도는 ‘정통 판타지‘라고 이름붙여도 무리 없을 정도.
이 스트레이트 재킷은 한때 홈페이지를 시끄럽게 했던 스크랩트 프린세스의 작가 사카키 이치로우의 또다른 작품으로 개인적으로는 소재면에서나 기타 다른 면에서 스크랩트 프린세스보다 훨씬 취향에 맞았다.

이 작품의 시대는 사람들이 마법으로 산업을 부흥하는 시기로 처음에는 제한없이 흥청망청 마법을 써댔지만 정작 마법을 쓰는 게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인간이 인성을 잃은 ‘마족‘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큰 댓가를 치루고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마법의 사용은 주소라고 불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오염을 발생시키며, 이것이 사람에게 있는 ‘인간을 이루는 것‘의 테두리를 벗겨버린다. 이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형태‘가 고정되지 않은 채, 점차 정신과 육체가 모두 변형, 변질해버린 것을 ‘마족‘이라고 하며 그 마족이란 곧 ‘재난‘이다.

그러나 교통사고가 난다고 해서 자동차를 없애고 살수는 없듯이 마법의 위험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마족으로 변해버린 사람들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전술마법사(Tactical Sorcerist, 통칭 TS)는 그 중에서도 엄격하게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레이오트 스타인버그는 국가에 등록되지 않은 무자격 TS로 실력은 일류이지만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개인 사정 때문인지 삶에 대한 집착이 전혀 없는 건조한 성격. 마족이 여성을 강간하여 태어나는 종족인 CSA(Congenital Sorcery Addict) 소녀 카펠테이타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그와 카펠테이타가 우연히 마법관리국의 에린을 도와주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품 분위기는 엄청나게 건조한 편이며 이 TS들이 마족을 해치울 때 입는 갑옷과도 같은 장비가 부제이기도 한 몰드(mold)이다. 마법 지팡이(형태가 총이든 대포 모양이든..;)를 스탭이라고 한다든지 마족으로 변하지 않는 선에서 사용 가능한 구속자(구속도수)가 정해져 있고 그 갯수 안에서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한번 사용할 때마다 소요되는 갯수가 모두 달라서 그걸 조절해서 마족을 단번에 쓰러뜨려야 한다는 등의 소소한 설정등이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작가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능숙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수준은 나쁘지 않은 정도. 중간에 약간 늘어지거나 산만하지만 캐릭터가 뚜렷하게 잘 잡혀있다보니 읽는 재미도 있고 읽다보면 뒷 내용이 궁금하기도 하다. 평소에는 이런 쪽 정통 판타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 정도로 재미있게 볼 수 있다면 일반적으로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작가 본인도 후기에서 말했지만 작품 내에서 ‘개그‘라는 요소는 거의 눈을 씻고 찾아볼래도 없고 내용도 하드하고 상당히 잔인한 편이다.
그래도 주인공 스타인버그나 그녀의 파트너(?) 카펠테이타의 성격이 꽤 마음에 든다.(에린의 경우는 좀 더 두고봐야겠다. -_-‘)
서술 도중에 가끔가다 작가가 도취되어 옆길로 새기도 하는데 그래도 옆길로 새는 서술도 꽤 읽을만하다는 게 강점인 듯하다. 거창한 마법 주문과 기계적인 몰드의 묘사가 언밸런스하지만 미묘한 개성을 만들어낸다. 마치 해리포터에 터미네이터(?)를 섞어놓은 것 같다고 해야 하나.

1월에 나올 신간 중에 주목할만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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