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예전에 매주 일요일 아침에는 TV에서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를 틀어주곤 했습니다.
그때 봤던 게 작은 아씨들이라든지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게 있었지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로빈 후드였던 것 같은데(이건 니혼 아니메 시리즈가 아니었는데, 마리안을 스토킹하는 정체불명의 기사가 인상적이었던) 그때 봤던 이런저런 작품들이 각색도 잘 되어 있었던 데다가 엄청 재미있어서 눈도 안 떠지는 일요일 아침에 꾸역꾸역 보닥 TV앞에서 도로 잠들어버린 적이 수차례 되었지요.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키다리 아저씨입니다.
원래 원작도 좋아하는데 애니메이션은 거기에 적당히 로맨스를 강화해서 매주 일요일 아침을 기다리게 만들었더랬지요. 얼마전에 TV 시리즈 전편이 DVD로 나오면서 그 전에 나왔던 편집판을 단돈 4,000원에 팔고 있길래 한 장 샀습니다(대체 이런 정품 DVD가 4천원돈이라니..;).

이 편집판은 TV 시리즈 중에서 1시간 30분 분량 정도를 추린 것으로, 전체 줄거리를 대강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대로 무리없이 볼 수 있게 되어 있더군요. 단돈 4천원으로 오랜만에 그 당시 TV판의 향수를 즐길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역시 보고 나니 전체 TV판이 탐나네요(…;).

어린 시절에 봤던 이런 명작 계열이라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10대에 봤던 감상과 20대 후반인 지금이 감상이 달라지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에 이 책을 보면서 오로지 쥬디와 저비스 씨의 서프라이즈(!)한 반전 로맨스(反戰 아님..;)에 가슴 두근거렸던 것 같은데 오늘 이 작품을 다시 보면서는 키다리 아저씨임을 숨기면서 어린 소녀의 진심을 관전하는 사악한 저비스(…)의 마수에 분노하며 마지막 장면에서 쥬디가 ‘미안하다니요, 당신이 키다리 아저씨여서 너무 기뻐요’ 하는 대사에 ‘이봐, 이봐. 좀더 냉정하게 상황을 생각해봐, 저 사람은 다 알고 있으면서 널 속인 거라니까’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걸 보면 이제 정말로 세상사에 찌들어버린 것 같습니다(그럼에도 여전히 좋아하는 작품 중에서 단연 상위 랭크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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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sponses

  1. 리츠코

    장미의신부>저는 아직까지 TV판 세트를 살까 말까 고민중이군요. 편집판으로 보고 나니 오히려 감질맛이 나더라구요.
    siyang>띠동갑이 넘는 아가씨를 차지하면서 감히 칼자루를 쥐려고 하면 벌 받지요~( ”)
    jjaya>무슨 로또랍니까..;

  2. jjaya

    세상은 돈… 인생 한방이지…(..)

  3. siyang

    저는 키워서 잡아먹기..라는 생각은 안한게, 그 남자가 정말 죽도록 요령없는것이 맞다니까요>_< 결국 막판에는 자해공갈로 성공하긴 했지만, 돈도 정성도 사랑도 듬뿍 쏟고 칼자루도 아가씨에게 쥐어주는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4. 장미의신부

    저도 이번에 한국 들어가서 산 키다리 아저씨 만화책들을 보고나니 왠지 애니가 보고싶어지더군요. 저야 키워서 잡아먹기의 교본(…)이라 생각하는만큼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옆에서 보던 누군가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뭐, 제 생각으론 돈많고 명짧은 남자를 잡기 위해 그 정도는 알고서도 눈감아준게 아닐까…싶은…(험한 세상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훗…)

  5. 리츠코

    siyang>그러고보면 예전에 명작이라고 읽었던 작품 중에 은근히 할리퀸 류의(?) 로맨스물이 많았지요.
    저도 이번에 다시 보니 계속 그 저비스 아저씨의 삽질만이 눈에 보이더군요. -.ㅜ
    siva>그런 경우는 조숙했다고 하는 거지요.(‘-`)

  6. siva

    OTL 4년동안 사람 바보 만들면서 히죽거리고 있었을 에로오야지에게 분노를 느꼈던 중학생 시절의 저는 이미 세상에 찌들어 있었던 겁니까아…(…)

  7. siyang

    [키다리 아저씨]는 인생에서 가장 먼저 접한 순수 로맨스 소설이었지요(끄덕끄덕) 나이가 들어 다시 보니 저비스 아저씨가 나이 마흔이 되어서 얄팍한 술수를 써서 꼬셔보다가 주디가 맘대로 안움직이면 삐지는 것이 상황상 빤히 보여 심히 웃깁니다만, 저도 여전히 너무나 너무나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