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린양 반은 한달에 한번 정도 짝을 바꾸는데, 두달쯤 전에 1학기부터 이래저래 반 친구들과 트러블이 좀 있는 아이가 걸려서(초등학생 치고는 좀 심한 욕을 입에 달고 산다든지 자기 기분에 따라 아이들을 괴롭게 한다든지 류의) 린양과 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일단 최대한 그 아이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빌미를 주지 않고,
그럼에도 혹 때리거나 하는 경우에는 하루에 몇번이든 상관없이 선생님에게 바로 이야기할 것,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분명하게 화를 낼 것.

대충 이 정도 선에서 버텼는데 린양은 오히려 신체적인 것보다는 폭언에 가까운 험한 욕을 매일 가까이서 듣는 게 너무 싫다고 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나도 은근 힘든 시간이었더랬다.
아이 엄마한테 직접 이야기를 하면 빠르지 않은가 하겠지만 이미 그 엄마에게 클레임을 건 엄마들도 많았고 그 엄마 본인도 아이의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데 어떻게 안 되고 있는 상황인 걸 알고 있어서 두어번쯤 심각하게 전화를 걸까 고민을 하다가 어찌저찌 한달이 지나갔다.

린양은 본인이 그때 어지간히 힘들었던지 그 뒤로도 걔와 짝이 되는 아이들 이야기를 가끔 하곤 했는데, 자기 다음 짝인 여자애가 남자애랑 싸우긴 해도 걔는 선생님에게 힘든 점을 말을 안 해서 걱정이라든지, 또 그 다음짝은 린양이 친하게 지내는 친구인데 평소에 절대 학교에서 울거나 하는 일이 없을 애가 힘들어서 울기까지 했다며 심난해했다.

그러더니 11월 중순쯤에 린양이 집에 오더니 짝을 바꿀 때도 아닌데 갑자기 다시 그 아이랑 짝이 됐단다(심지어 당시 짝은 평소 린양이 짝을 하고 싶어했던 아이었는데).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해서 왜 그렇게 된 거냐고 물으니.

문제였던 아이의 당시 짝인 린양 친구가 도저히 견디질 못하겠다고 선생님에게 건의(?)를 해서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모두 눈을 감고 대신 짝을 해줄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단다.
린양 설명으로는 자기 친구는 당시에 정말 너무너무 힘들어 보였고 자기는 그 남자애랑 짝을 하는 게 그만큼은 힘들지 않았던 것 같아서 그 상황에서 손을 들었다고.(한달 동안 그 고생한 걸 잊었냐…-_-)

“야, 이… 니가 무슨 마더 혜레사라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누르며 돌려서 ‘너, 지금 짝은 니가 엄청 짝이 되고 싶었던 애잖아?’라고 물으니 ‘막상 해보니 뭐 그냥저냥’이란다.

이 상황에서는 분명 아이의 이타심을 칭찬해주는 게 정석일 거 같은데 정말 도저히 선뜻 그렇게 되지 않더라.
내가 좀 속상해하는 게 보였는지 린양은 내 눈치를 보며 ‘내가 잘못한 걸까?’라고 묻는데 차마 거기에 뭐라고는 못하고 ‘니가 해볼만해서 한 거면 됐다, 대신 이번에는 정말로 조금이라도 힘들면 바로 이야기를 해라, 엄마가 바로 그 아이 엄마한테 연락을 해서라도 말려주마’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 뒤로 한동안 학교에서 하원하는 린양에게 내가 하는 첫 말은 ‘오늘은 별일 없었어?’였고 문제의 그 아이도 그렇게 공개적으로 도중에 짝이 바뀌니 열쩍었는지, 그게 창피한 건 알았는지 남은 두 주동안은 전보다도 훨씬 조용했단다.

그리고 12월 초에 다시 짝이 바뀌고-선생님이 두 주 동안에 대한 포상(?)을 하신건지-좋아하는 여자 친구와 짝이 되어 린양은 매우 행복하게 등원 중.

이렇게 일은 다 지나갔는데 나는 그 뒤로 내내 생각이 많다.
이야기를 듣던 당시의 내 반응은 옳았던 걸까, 세상이 워낙 각박하다보니 혹 나중에 이런 면을 이용당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린양이 말한 그 ‘견딜만하다’는 선을 어느 정도 수위까지 잡는 게 옳은건지 가르쳐야하나? 이런저런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가 문득 엄마로서의 내 이기심에 씁쓸하기도.
나 역시 좀더 이타적인 인간이었다면 아이에게 좀더 다른 반응, 명료한 충고를 해줄 수 있었을까?

+이번 일들을 겪으면서 내가 다음번에 이런 비슷한 고민을 누군가에게 들으면 절대로 ‘어디에나 그런 아이는 있으니 연습하는 셈이라고 생각해’ 라는 말 만큼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린양이 형제가 없다보니 은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꽤 있다)
내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그런 아이에게 부대끼는 것도 세상을 배워나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들으니 그것도 한편으로는 울컥 하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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