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뭘 읽을까, 고민하고 있었더니 린양이 추천한 작품.
재작년인가, 제목이 엄청 자주 보이길래 린양 읽으라고 사놨었는데 린양도 차일피일하다가 바로 얼마 전에야 손에 잡았고 재미있었다며 이 작가 신간인 ‘나인’도 사달라고 해서 마저 사줬었다.

생각해보니 SF 장르는 원래 그다지 찾아서 볼 정도는 아니었는데, ‘옆집의 영희씨’도 그랬고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접하게 되는 것 같다.

작품은.

너무나 좋았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작가의 말

성질이 급해서 이 정도 재미있는 책은 평소같으면 손에서 못 놓고 한 나절에 완독했을텐데 이 책은 이상하게 읽으면서 슬프고 작가가 던지는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느라 잠시 쉬고 다시 잡기를 반복했더니 평소보다 세 배쯤 오래 걸린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작가의 말에 적혀 있는 저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라는 문구를 보면서 마치 내가 달리는 말, 작가가 기수였던 듯한 기분이 들 정도.

최근 읽은 우리나라 SF 작품들은 정말 감정선이 섬세하고 우아하다.

기술이 발전해서 휴머노이드가 공존하는 세상에서의 최저임금 문제를, 시력이 나쁘면 간단한 시술로 더 이상 안경을 쓸 필요가 없고 하반신이 마비되어도 인공 하체로 불편없이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아직 휠체어를 타야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한 곳에 모아서 마냥 가라앉지 않게 펼칠 수 있을까. 더불어 지치지 않게 중간중간 활기를 불어넣도록 배치한 지수라는 캐릭터는 너무나 적절했다.

그 또래의 아이를 키우를 엄마로서 보경, 은혜, 연재 세 모녀의 서로 상처를 줄까봐 다가서지 못하는 감정선에 몰두하고, 보경이 먼저 떠난 남편을 한번도 ‘남편’이라 칭하지 않고 ‘소방관’이라고 하는 것도 묘하게 가슴이 찡했다.

그리움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을 예견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 준비라도 할 텐데, 친절하지 못했던 이별처럼 그리움도 불친절하게 찾아왔다.

p168

아마 그건 보경이 당장 두 아이와 계속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싶지 않아 고른 지칭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이런 소설을 읽고 있으면 등장인물 중에 이 엄마에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다. 돈이 없어서 걸을 수 있는 아이를 휠체어에서 생활하게 만드는 괴로움, 그 아이를 보살피느라 둘째가 소외되는 걸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어 무한한 방목으로 자유를 주었다 위안삼는 마음.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p343

그리고 모든 것을 관찰하듯 바라보며 굿닥터의 숀 마냥(…) 맞는 말만 쏟아내던 콜리의 엔딩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책 맨 뒤의 심사위원들의 평에서도 말했듯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마치 한 마리의 준마처럼 흔들리지 않고 곧게 걸으며 벌여놓은 이야기들을 차분하게 끝까지 마무리한 점이 아니었나 싶다.

다음 책은 ‘나인’을 잡아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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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sponses

  1. 저도 몇달 전에 이 책 우연히 동네 도서관에서 발견해서 빌려다 읽었는데 정말 좋았어요. 이번에 사극 촬영하다 죽은 말 얘기를 기사에서 보는데 경주마로 달리다 ‘오늘 죽어도 되는 말’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표현을 보는데 바로 이 책이 떠오르더라구요. 개인적으로는 SF는 그다지 선호하는 장르가 아닌데 한국의 SF는 좀 독특한 감수성이 담겨 있어 그런지 몇가지 읽은 것들이 다 괜찮았었어요.

    1. Ritz

      재작년(2020년이 벌써 재작년이라니…)에 많이 핫했던 책이었는데 이제야 읽었네요. 지난번 넷플릭스의 고요의 바다 볼 때도 생각한 건데 한국의 SF는 과학적인 이론보다는 감수성?에 더 포인트를 두는 느낌인데 저는 그게 제 취향이랑 맞는건가 싶더라고요.

      ‘죽어도 되는 말’이라니, 그따위 말을 쓰는 인간은 언제 죽어도 되는 인간이라고 쓴 사람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네요. -_-+ 안그래도 혜린이가 방과후 수업으로 승마 수업을 들을 때 거기에 오는 말들이 경주마로 생명이 다한 애들이라고 해서 은퇴 후에 그렇게라도 살 방도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방과후 수업이 너무 줄어서 어찌 돌아가려는지…

      전 어제 밤에 이 책 다 읽자마자 마침 동네에 새로 생긴 베스킨라빈스 무인상점에 갔다가 이 책에 나왔던 편의점의 휴머노이드 베티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 무인계산대는 참 익숙해지기 어렵고 이렇게까지 아낀 비용은 누구에게 가는 걸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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