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인터넷 서점을 뒤져보니 새로 리뉴얼 된 책이 나왔더군요
그러나 집에 있는 것은 1996년도 판입니다.
책 뒤에는 동생이 적어둔 ‘영어 학원 단어 시험 부상으로’ 라는 문구가 있군요. ^^

화가와 모델을 읽으며 ‘그림에 대한 좀 더 다른 이야기’를 찾아보다가 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을 읽었는데, 그걸 읽다보니 정작 ‘르네상스’에 대한 책을 좀 더 읽어볼까 하는 마음에 생겨 시오노 나나미의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집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는 책읽기를 좋아합니다.
동생이 사둔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새 책을 주문할 뻔했는데 다행히 주문 전에 동생이 ‘그거 집에 있잖아’ 해서 알았네요. -_-; 동생과는 책 읽는 취향이 좀 달라서 몰랐는데(라기보다는 최근 일반 서적은 거의 담 쌓고 살다시피 해서) 이래저래 찾아보니 이것 말고 체자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도 집에 있었군요. 유감스럽게도 이 르네상스의 여인들 한권을 아주 한큐에 뚫고 지나가다시피 하는 체자레 보르자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해서 그쪽은 별로 구미가 당기질 않네요.

저에게 있어 르네상스란 세계사 시간에 그저 오만 화려하기 그지 없는 미사여구들로 장식된 단어에 불과하며 체자레 보르자와 루크레치아 보르자란 사이토 치호의 ‘화관의 마돈나’에 나오는 등장인물(…) 이상의 정보가 없었기에 여기에 등장하는 네 여인들의 이야기를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지금도 기억나는 건 눈발 펄펄 날리는데 체자레가 시집가는 루크레치아를 목터지게 부르는 장면)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은, 역시 현실은 소설보다 기이하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네 여인들-이사벨라, 루크레치아, 두 카테리나-은 소설만큼 치열하고 비정한 르네상스의 정치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비범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읽으면서 가장 끌렸던 것은 역시 이사벨라 데스테였지만 실제 저같은 사람은 그런 환경 속에서라면 카테리나 코르나로처럼 살지 않았을까 싶군요. 뭐, 때로는 진실을 모르는 채로 내 일신만 편하면 그게 더 행복할 때가 있으니까요. ^^
이 네 명의 여자들은 모두 제각각 자신의 방법대로 르네상스를 걸어갔고, 거기에 무엇이 더 옳고 그른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는 문제겠지요.

소설 읽듯이 읽을 수 있는 부담없는 문체(이전에 읽은 책이 문장이 좀 괴로워서 더 그렇게 보였을지도)도 마음에 들었고, 흥미로운 사건들과 인물을 잘 모았다는 점 역시 좋았습니다(시오노 나나미 책은 뭔가 예전에 읽었던 게 있는 것 같긴 한데 기억이 가물하네요). 나머지 세 명은 모두 거의 처음 들어보는 인물들인지라 아, 그렇구나 하며 읽었는데 루크레치아 보르자만큼은 읽으면서 약간 갸웃거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녀와 그의 아버지, 그의 오빠들간의 근친상간에 대해서는 넘어가고 뭔가 ‘꿈많고 사랑을 듬뿍 받은 소녀’의 이미지를 그려놨는데, 아무리 그렇게 봐주려고 해도 아버지가 굳이 열살짜리 딸을 엄마랑 떼어서 자기의 또 다른 애인이 있는 궁에 함께 살도록 한 건 이래저래 수상하기 그지 없지 않나요. -_-;;
작가가 이야기 중간중간에 서술하는 코멘트들이 대부분 실제 사건에 대해 약간은 미화하려는 느낌이 있긴 했지만 이문열의 삼국지보다는 낫더군요.(적벽대전은 100만대군이었다-라고 기껏 써놓고 뒤쪽에 ‘실은 알고보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거다-라고 적는 김빼기)

약간 상관없는 이야기 | 소위 말해 삼천포 | 단, 트리니티 블러드를 먼저 읽고 본 관계로 마치 여기 등장하는 카테리나 스포르차가 외눈 안경에 붉은 수단이라도 입고 있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좀 괴로웠습니다(이번 4권에서는 에스데 집안도 나오던데…). 그렇지만 트리니티 블러드를 읽으면서 내내 입가에 조소를 띠며 ‘교황한테 이런 배다른 자식들이 있을 리가’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소 해소되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었습니다. 요시다 스나오는 결국 자신의 작품 세계를 ‘르네상스 분위기의 미래 세계’로 잡고 있는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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