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지난번의 실패를 딛고 이번에는 어찌어찌 제대로 원하던 내용이 들어있을 것 같은 책을 구했습니다만, 막상 받고 나니 무슨 전공서적마냥 하드커버에 두꺼운 분량(614페이지)을 보고 잠시 굳었으나…

어찌됐든 내용은 아주 지대로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해서 죽는 순간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시간순으로 서술해나간 전형적인 전기였는데 읽다보니 책 무게가 좀 괴로운 것 빼고는 흥미진진하더군요.

흔히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해 서술할 때 언급되는 영국의 황금기, 또는 여왕 본인의 호걸성은 역시나 시대가 흐른 후 ‘역사가 평가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책은 전기 형식이다보니 그 시대 속으로 들어가 그 당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들었던 것보다 훨씬 치열하고 환상적이지도 않은 데다가 갑갑하기까지 합니다.

후세에서 평가하기에는 ‘황금기’이지만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지금을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경기’였고, 그렇게 재정적으로 풍족한 왕실을 꾸렸다는 엘리자베스 여왕 역시 항상 재정난에 시달렸더군요.
열강의 한 가운데에서 눈치를 보느라 읽는 사람이 머리가 지끈할 정도였고 그 와중에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를 떠안는 바람에 호시탐탐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그녀를 견제하느라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중년이 될 때까지 의회는 ‘결혼을 하라’고 여왕에게 압력을 넣었으나 제가 보기에도 대체 저 와중에 언제 결혼은 할까 싶을 정도로 여왕을 제대로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_-;

읽다보니 마치 이문열의 삼국지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갈공명이 적벽대전에서 수많은 적을 물리쳤다~’ 라고 서술한 다음 이문열이 ‘실은 그 수많은 적이 별로 많지 않았다더라’ 라고 토를 다는 것처럼 이 책에서도 그 당시에 엘리자베스 여왕도 항상 재정적인 궁핍에 시달렸다, 라고 하고는 ‘그래도 뭐 다른 왕들에 비해서는 양호한 것이었다’고 하는 식입니다.
웅장하고 호쾌한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추천할 수 없는 책입니다.

그래도 워낙 인간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서술해서 여왕의 인간미는 오히려 더 잘 살아 있습니다. 흔히 생각했던 것처럼 여걸의 모습이 아니라 갑갑할 정도로 의심많고 소심합니다.
자신이 필요할 때는 자신을 ‘여성의 악한 습성을 가지지 않은 남자의 심장’이라고 주장하다가 우유부단해질 때는 ‘내가 여자니까 그렇잖수’ 하고 스르륵 방어막 치는 모습이 죽이더군요.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애인일지라도 절대 한없이 다 주지 않고 얼르고 뒤통수 쳐가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애완견일 뿐’이라고 하는 걸 보면 그래도 당시의 여성 치고는 역시 보통이 아니긴 하지요.

결론은, 영화를 보고 피상적으로 궁금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풀어주는 책이었습니다. ^^ 영화와 역사적 사실을 비교하는 재미도 꽤 쏠쏠했고 말이지요.

ps. 보면서 괴로웠던 것은 역시…
영국 사람들은 그렇게 자식 이름 짓는 센스가 없단 말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_-;
여자 이름은 죄 메리, 캐서린 아니면 엘리자베스인데다가 남자들 이름은 전부 아버지와 같아서 ‘디노 공작 아들 이름도 디노’인 식이니…-_- 나중에는 이 디노가 아비 디노인지 아들 디노인지(…) 헷갈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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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responses

  1. 미사

    그러고 보니 저 메리 여왕 평전을 읽고 블로그에 올리려다 말았지. 결론은 <아니, 이런 미친뇬이 다 있나!(버럭)>이었음 -_-;;; 어쨌든 재미있는 책이고 헌책방에 있기에 지금 주문해 날렸음 ^^ 재미있게 보길~~~(하긴 나도 헌책방에서 구했었군)

  2. 리츠코

    Tom>설마 비행기 티켓 때문에 필요한 이름에 장난을 쳤을까 싶긴 하지만..;; 이름 짓는 게 좀 징하군요. -_-
    미사>일반 엘리자베스 전기에서도 우유부단과 딴청이 화려하게 꽃피는데 심지어 메리 여왕의 입장을 쓴 전기라면 그야말로 성질급한 사람은 숨 넘어갈 듯..;; 혹시 빌려주실 수 있으시면 빌려주세요. ^^

  3. 미사

    자, 엘리자베스를 다 떼었으면 이젠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을… ^^;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읽을 만했소(문제는 품절 -_- 빌려줄까아~?). 거기서도 역시 엘리자베스는 우유부단과 딴청에 대해서는 득도의 경지로 묘사되었음 -_-;;;

  4. Tom

    서구 문화의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영국도 고대로마의 영향력에 놓여 있었고, 작명법도 로마식을 따른 듯. 로마식 이름짓기에 대한 설명이야 생략~. 어쨌든 비슷비슷한 이름이 줄줄이 양산되는 방식이더만. ^^;

    이름 얘기하니까 생각나는 건, 아랍식 작명법.
    성(가족이름)이 없이 이름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첫이름이 자신의 이름이고 나머지 뒤에 따르는 것은 아버지, 할아버지 등 그 선대의 이름. 예를 들어 3대의 이름이 ‘압둘’이고, 그 아버지의 이름이 ‘하킴’ 이었고, 1대 할아버지의 이름이 ‘무하마드’였다면, 3대의 풀 네임은 ‘압둘 하킴 무하마드’
    거기에 무슨 칭호가 들어가고 별명이 들어가고 그런 식.
    예전에 모 항공사에서 일할 때 이름만 달랑 말하는 아랍인에게 ‘호호~ 이름 전부를 말씀해주셔야죵~’ 그랬다가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걸랑. 발음도 잘안되는 영어를 철자까지 확인해가며 일일이 확인한 이름은 80컬럼 모니터 화면으로도 두줄을 꽉 채웠었다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 장난 친거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 쩝…

  5. 리츠코

    Dino>인권 침해라뇻. 작위를 드린 건데!! 그것도 제일 높은 공작으로!!
    뉴타입>2세, 3세면 구분이나 가지, 이건 죄 이름이 그냥 같아 버리니…-_- 아버지의 뜻을 잇겠다는 의미는 알겠지만 한집안에 부자가 이름이 같은 건 우리나라 정서로는 정말 애매하다니까요.
    니세하루나>당연히 아비 디노님 아니실까요… 이제 디노님이 아들을 낳으시면 아들 디노가…(‘-`)
    ASTERiS>점점 이야기가 범우주적으로 발전하고 있군요(…)
    paravati>디노님이 아들을 낳으시면 디노 주니어♡

  6. 헨리 존스 “주니어”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7. 스~하~ 스~하~ 내가 늬 애뷔다~~ 라고 하시는 겁니까?

  8. 답글다신 디노 공작께선 아비 디노이신가요~ 아들 디노이신가요~ ( ‘_’)

  9. 뉴타잎

    그거 영국인 뿐 아니라 서양 세계 다 공통 이던데, 아버지 로버트, 아들 로버트2세, 손자 로버트3세 이런게 수두룩 하잖우. 이름을 돌려쓰다보니 스피키오 라고만 하면 이게 누군지 절대 구별이 안가서 대나 소 붙이고 하잖아.

  10. ……………. 이건 인권침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