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두 주전에 도서관에서 빌렸던 책 한 권이 정말 너무너무 심하게 진도가 안 나가서 절반쯤 읽다가 결국 포기하고 반납한 김에 가볍게 읽으려고 고른 책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는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런 것 치고 이상하게 이 작가의 다른 작품에는 또 손이 선뜻 안 가서 읽은 게 거의 없어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을 읽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고 또 읽으면서 왠지 처음 ‘용의자 X’를 읽을 때의 그 강렬한 재미마저 희석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그래서 화차를 읽었을 때의 그 강렬함이 다른 작품들로 인해 흐려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다른 작품은 외면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별 생각 없이 골랐던 이 책은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어요.
화차를 읽을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무엇보다 이 작가의 글은 잠시 눈을 떼고 쉴 틈을 찾을 수 없어요. 한번 잡으면 그냥 술술 읽으며 그대로 끝까지 가는 느낌? 제목만 보고 게임이나 가상현실 이야기일까 했는데 전혀 다른 소재더군요. ^^;

작품 속에서 ‘가족놀이’의 ‘딸’ 역할을 하던 여자애가 어느 동호회 게시판에서 매번 눈팅만 하다가 어느날 문득 자신이 외롭다는 이야기를 적어올리게 되고 그 글을 읽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나 조언에서 위안을 얻으면서 게시판 사람들과 소통하는 재미에 빠져든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예전에는 피씨통신에 대화방들이 성행했고 요즘은 알음알음 사람들끼리 카톡으로 대화방을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러다보면 어쩌면 우리는 얼굴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혹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속에 있던 이야기를 더 쉽게 할  때가 있지 않나 싶어요. 처음에는 어려운데 어떤 계기로든 스스로 빗장을 한번 풀어버리면 나와 그리 가깝지 않아서 오히려 부담없이 이야기 할 수 있더라고요.
저같은 경우는 내 얼굴에 무슨 자백제가 있나 싶을 정도로 어이없을 정도로 잘 모르는 사람이 직접 하는 굉장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듣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어서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_-;(집에 정수기 점검하러 온 아주머니가 묻지도 않았는데 본인의 인생사-무려 남편과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게 된 과정까지-를 고스란히 이야기하시는데 정말 심각하게 나한테는 무슨 자백의 오오라가 있는 걸까 고민했었음)

화차 때도 그랬지만 이 책에서도 작가는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걸 참 선명하고 또렷하게 짚는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서로간에 ‘보여주고 싶은 면만을 골라 보여주고 남에게서 얻고싶은 위안만 가려 얻는 위선적인 세계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런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은 어떤 면에서는 의미를 가진다’는, 인터넷에서 만나는 사람들간의 관계에 대한 시점에도 많이 공감했네요. 어쩌면 요근래 내가 하던 고민과 어느 정도 맞물린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어요.

슬슬 히가시노 게이고는 좀 쉬고 미야베 미유키 작품들을 찾아볼까 싶습니다. : )

작품 마지막에 등장인물 중 한명이 읊조리는 이 시는 참 깔끔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는데 마음에 들어서 저장용으로.

이윽고 지옥에 내려갈 때
그곳에서 기다릴 부모와
친구에게 나는 무엇을 가지고 가랴.

아마도 나는 호주머니에서
창백하게, 부서진
나비의 잔해를 꺼내리라.
그리하여 건네면서 말하리라.

일생을
아이처럼, 쓸쓸하게
이것을 쫓았노라고.

「나비」 사이조 야소
R.P.G.6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북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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