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2020년 한 해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버텼는데 깜냥에 맞지 않은 짓이었던지 결국은 올해 탈이 났다.

알고보니 괜찮지 않아서 딱 죽지 않을 만큼 숨을 못 쉬어 응급실에 달려갔다가 공황 진단을 받았고 그러고도 치료에 들어가기 망설여져서 한여름 내내 쌩으로 앓다가(신경계의 문제라서 여름에 공황이 심해진다는 걸 어떻게 미리 알았겠어) 백신을 맞으러 가야하는데 심장이 뛰어 갈 수가 없어서 결국 내 발로(이것도 반쯤은 옆에서 등 떠밀어줘서) 병원에 가서 치료를 시작했으니 실로 파란만장 2021년.

맨 처음 급하게 검색해서 찾아갔던 정신과 의사는 공황 진단을 내리면서 모니터를 내 쪽으로 착 돌리더니 치료에 들어가면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의 부작용에 대해 모니터 화면에 한가득 차라락 띄우며 브리핑을 시작했는데, 끝도없는 부작용 리스트를 보고 있으니 차마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마 그렇게 정보를 요약해서 빨리 전달하는 타입의 의사와 맞는 환자도 있을텐데 나는 일단 아니었다.

그 날 받아온 약으로 버티며 여름이 지나니 더 이상 약 한 알로 예전만큼 효과가 듣지 않는 느낌에 등골이 서늘해져 찾아간 동네 병원의 의사는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척 삼촌들과 비슷한 억양의 사투리 말투가 남아있는 차분한 분이었는데 약에 대한 설명도 좀더 유연했고 개인병원이라 조용하고 병원 위치도 집에서 도보로 15분 거리라 접근성이 더할나위 없이 좋아서 일단 정착.(새 병원 갈 때마다 5~6장의 설문지를 풀어야 하는 게 귀찮아서 가능하면 빨리 자리잡고 싶었음…)

‘그럼에도 여기에서’ 中에서.

보통은 얼마나 자주 가는지 모르겠지만 초반에 너무 힘들 때는 일단 상담을 가서 나의 불안에 대해 쏟아내고 오는 것만으로도 컨디션이 어느 정도 돌아와서 일주일에 세 번도 가고 그 뒤로는 두 번씩 꼬박꼬박 갔더니 두어달만에 30회차를 찍었다.(뭐 쿠폰 같은 거 없나요…)

어쨌거나 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은 공황 치료를 시작한 것.
매일 먹어야 한다는 게 왠지 꺼려지던 약은 막상 먹기 시작하니 혈압이 높아서 먹는 고혈압 약이나 신경 조절이 힘들어서 먹는 이 약이나 뭐가 다를까 싶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며 끊임없이 삶의 불만을 토하고 토한 다음 ‘역시 이야기해서 푸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을 뿐이었고 정말 힘든 생각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더 효율적으로 풀릴 수 있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더 빨리 마음이 편해지고 응급실까지 갈 일은 없지 않았으려나.

세상에 갑자기 ‘정신과 상담을 받은 사람들이 경험한 이야기’를 쓴 책이 우후죽순 늘어난 것도 아마 그 사람들이 그 동안 조금은 터부시되던 정신과 상담을 ‘겪어보니 너무나 새로운 세상’이라 타인에게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서라는 걸 이제는 알겠는데, 그래서 오히려 나는 정신과 의사의 전문 서적이 아니라 개인의 상담 경험에 대한 책이 너무 많아지는 게 과연 옳은가 싶다.

나도 공황 진단을 받고 처음 읽은 책이 나처럼 공황장애인 사람이 쓴 치료 과정 에세이였는데 이런 책을 읽고 나면 마치 나도 어느 정도 ‘진료를 받은’ 기분이 든다. 그 책을 읽고 나도 바로 병원에 갈 의욕이 생겨야 하는데 오히려 ‘어느 정도 정보를 얻었으니 좀더 있다가 가도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들어서 약으로 여름을 버텼는데 어차피 판데믹 한 복판의 우리는 누구나 힘들고 병원의 문턱은 생각보다 높지 않으니 가능하면 책을 보고 위안받기보다는 직접 가서 나에게 맞는 상담을 받는 걸 추천하고 싶다. 내가 블로그에서 상담 받은 내용이나 관련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 내가 상담을 가서 나누는 이야기는 오로지 나만의 것이더라.

내가 한 해 내내 비틀거리는 동안 옆사람은 옆에서 버팀목이 돼주었고 딸내미는 씩씩하게 알아서 자기 할 일을 하며 내 걱정을 덜어주어 그저 감사할 따름.

마음의 고장은 물리적으로 난 상처처럼 아무는 것이 눈에 딱 보이지도 않고 치료도 더 복잡해서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길어질 것 같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플 때도 가능하면 ‘괜찮아’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이번만큼은 내가 ‘괜찮지 않으니’ 나 자신에게 시간을 줘야 할 것 같다.
당분간은 상담 다니면서 차분하게, 내가 사랑하는 정씨들에게 집중하는 한 해를 보내는 게 2022년의 목표.

Good by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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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responses

  1. 내내 보고 싶고 신경쓰이더라니… ㅠㅜ 내년엔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 마시면서 뵐 수 있기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 Ritz

      맛있는 커피와 카페, 넘어야 할 문제가 두 가지나 있지만 올해는 모든 게 해결돼서 꼭 만나서 커피를 마실 수 있길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한해 원하시는 바 모두 이루시길! 아, 그리고 쓰고계신 트위터 식물계정 쪽도 맞팔 좀 부탁드려요..ㅠ.ㅠ

  2.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 Ritz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 한해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가족 모두 건강하시길. 그리고 올해는 꼭 한번 뵐 수 있길요. ^^

  3. 응원드립니다. 언제나 리츠코님 글 보고 묘하게 누군가에게 이야길 듣는 것 같아 마음이 안정되었거든요. 조금 더 행복해지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 Ritz

      누구 만나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어서 글이 점점 수다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 유나씨도 늘 조금 더 행복하시길, 가족 모두 건강하길 기원합니다. 얼굴 뵌 지도 한참이예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4. 올해는 고생담들이 참 많이 들린다. 그래도 다들 잘 버텨 줘서 고마운 한 해였구나.
    그 마음이 어떨지 그저 짐작만 해 볼 뿐이지만, 잘 헤쳐 나가길 바라네.
    새해 복 많이~~ ^^

    1. Ritz

      1년까지는 어떻게든 버텼는데 기한없이 2년째를 넘어가려고 하니 다들 지치지 않았을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족 모두 건강하시길! ^^

  5. 기나긴 글을 읽다보니, 90년대 후반, 교정에서 만화 이야기하며 우리가 처음 친해졌던(?) 순간이 문득 떠오르네~ “드디어! 만화 좀 본 친구를 찾았다!” 느낌이었달까 ㅋㅋㅋㅋ 시간이 흘러 애엄마들이 되었지만~ 잘 살아보자, 친구! 내년엔 얼굴도 좀 보고 ^^ 새해 복 많이!!

    1. Ritz

      만화 좀 보고 결국 만화책도 만들어도 봤다지… 이 나이까지 연락이 닿을 수 있어 기쁘다우. 앞으로도 꾸준히 연락하며 지냅시다~ 내년에는 꼭 얼굴도 한번 보고.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을테니 시간 길게 비워줘~~ ^^ 새해 복 많이 받고 가족 모두 건강하길!

  6. 어우 고생많으셨습니다. 내년 한해는 정말 무탈하게 보내셨으면 좋겠네요…
    그 와중에 “뭐 쿠폰 같은 거 없나요…”에선 조금 웃었습니다만(…)

    올해 저도 집안에 아픈 경우가 많아서 (정작 저는 크게 아픈게 없었지만) 수술이 3건으로, 병원을 들락날락 거리다보니, 정말 아픈것도 아픈거지만, 의사를 잘 만나는것도 중요하지 않나 싶더군요…-ㅁ-

    어머니의 경우, 예전에 다니던 병원에선 그냥 물리치료만 계속 받고 통증제거 주사만 맞았는데 이번에 간 병원에서 제대로 보자고 하더니 수술하신(안했으면 정말 큰일날뻔한) 경우라서 병원도 여러군데 가는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잘 맞는곳이 근처라면 더더욱 좋고요…

    하여간 다가올 2022년엔 처음 말처럼 무탈하고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네요.

    1. Ritz

      의사 선생님 말로는 원래 처음에 ’10회’ 기준으로 시작해서 끝날 즈음에 10회를 더 진행할지 그만할지 이야기해준다는데 저같은 경우는 너무 짧은 사이에 10회가 끝나서 선생님도 체크를 못하고 저도 그냥 신경 안쓰고 예약을 잡아서 대략 25회쯤에서야 선생님이 정신을 차리고 ‘원래는 10회가 끝나면 그 다음 10회가 필요한지 아닌지 알려주는 것’이었다고 하시더라고요..( ”)

      정신건강의학과(라고 요즘은 부른다네요)는 인터넷에 검색해도 병원 후기 같은 게 잘 없다보니 막막하더라고요. 그나마 모두닥 같은 병원 평가 앱이 있어서 거기에 올라온 후기 보고 간 곳이었는데 그럭저럭 운이 좋았지 싶네요. 정신과는 갈 때마다 설문지를 새로 풀어야 해서 여러군데 알아보기도 매우 귀찮더라고요. -_-;

      몇년 전에 엄마가 간농양으로 수술하셨을 때 처음에 그거 잡아내셨던 의사선생님 아니었으면 정말 위험할 뻔한 적이 있어서 그 뒤로 의사를 잘 만나는 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길!

  7. 2022 잘살아 봅시다. 차츰 회복해서 커피도 간간이 한잔씩 마실수 있길 바래. 새해 복 많이★

    1. Ritz

      커피…ㅠ.ㅠ 맛있는 커피 마신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난다..ㅠ.ㅠ 카페에도 한번 놀러가야하는데 내년 안에는 가능하…겠지? 새해 복 많이! 늘 건강하고 돈도 많이 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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