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요즘 책을 고르는 것이 상당히 돌발적이긴 한데, 이번에는 TV를 보다가 책 소개 프로그램에 나온 걸 보고 마음에 들어 바로 주문해버렸습니다. 제목도 마음에 들고 프로그램에서 언뜻 소개하는 내용도 끌리더군요.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친[狂]듯이 몰두해야 남이 따라오지 못할 경지에 미친다[及]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미쳐야 미친다 라고 제목 삼았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책 내용은 말 그대로 조선 시대의 지식인 매니아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약간 아쉽게도 원하던 내용은 책의 1/3 정도였군요. 그래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는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의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는 모습과 뜨거운 열정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조선의 유교와는 좀 거리가 있으면서도 참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앞쪽에 다룬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책을 11만번을 읽었다는 독서광 김득신이나 추워서 손이 곱아 터져도 책에만 매달렸던 이덕무와 같은-의 일화들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둔재라고 할 수 있었던 김득신(이 사람 지금으로 치면 약간 지진아가 아니었을까도 싶음…;)의 그 아둔할만큼 한길을 파는 독서는 참으로 무언가 가슴 한켠에 남는 감동이 있더군요.

아무래도 제가 요즘 일상 속에서 무언가 미치는[狂] 어떤 열정을 잃은 게 아닌가 고민하고 있던 터라 그런지 이런 이야기들이 더 확 와닿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은 과유불급이지만, 정말로 어떤 경지에 이르기위해서는 병적으로 미치는 열정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글맛이 상당히 좋은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추임새도 만만치 않아서 간만에 참으로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여기저기 번역서들만 읽다보니 미처 즐기지 못했던 한국어만의 미려하고 단아하면서도 섬세한 묘사들이 참으로 멋있었습니다. 유홍준 교수와 비슷하긴 한데, 어딘가 글 느낌은 차분하면서도 필요한 부분에서 적당히 오바해서 감탄하는 스타일이더군요.

그리고 역시 저는 우부메의 여름에 나오는 양자론보다는 이 미쳐야 미친다의 전반에 깔렸던 동양 철학이 더 마음에 드네요. 오랜만에 연기론 운운하는 글들을 보면서 옛날 수업시간에 들었던 내용들이 스쳐가서 반갑기도 하고 ‘하나에 일체를 포함하니..’ 운운하는 그 유유자적한 사상에 다시금 마음이 푸근해졌습니다. 어느 한가지에 미치지 못하고 그것에 초조해하던 마음이 조금은 평온해졌다고 할까요.

아쉬운 점이라면 원했던 ‘미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짧았고 인문계 지식인들이 누구나 존경해 마지 않는(저어기 어디 문화유산기를 쓰셨던 어느 교수님을 비롯해서…) 정약용과 박지원에 대한 이야기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박지원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짧은 메모들에서 보이는 재치와 해학 등을 잘 보여줘서 즐거웠지만 정약용에 대한 이야기는… 뭐랄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너도냐!’라고 할 만큼 많이들 했던 이야기라서 좀 식상하더군요.

그래도 오랜만에, 읽으면서 ‘아, 기억해 둬야겠다’ 싶은 문구들이 많아서 즐거웠던 책이었습니다. 마음이 어수선해서 뭔가 다스릴만한 글을 읽고 싶은 분들이 계시다면 추천하고 싶네요.

마음에 닿는 글귀 하나
박지원의 척독 중에서

귀에 대고 하는 말은 듣지를 말고, 절대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며 할 얘기라면 하지를 말 일이요, 남이 알까 염려하면서 어찌 말을 하고 어찌 듣는단 말이오. 이미 말을 해놓고 다시금 경계한다면 이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인데, 사람을 의심하면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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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sponses

  1. 리츠코

    파자마//왠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 같아서 요즘 다시 책을 좀 이것저것 잡아보고 있지. –; 알라딘(인터넷 서점)에서 무료배송을 시작하고 나서 책 시킬 때 부담이 덜해서 그런지 자주 책을 사게 되더라고.
    나는 인생 지침으로서의 동양 철학은 좋아하지만 학문으로서는 재능이 없어서 공부는 그다지 땡기지 않는군(정확히 말하면 땡기지 않는 게 아니라 엄두가 안난다고 해야 하나..;).
    이 책은 안 그래도 너도 재미있어 할 것 같더라. 꼭 한번 읽어보라고.

  2. 파자마

    오, 요새 독서 열심히 하는군~^^ 혹시 다시 철학계에 몸담을 생각은…? ^^;;; 이 책 상당히 재미있어 보이네. 생각해 보면 나의 독서 인생은 고등학교 때 거의 끝난 것 같으이..;; 그 때는 읽지 말라고 하니까 더 열심히 숨어서 읽었었는데, 요새 같은 때는 아, 이거 한 번 읽고 싶다…라고 생각하다가도 금방 지나쳐 버리곤 하니…원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