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화인열전 1권과 명작순례를 사서 아무 생각없이 명작순례부터 집었는데 명작순례 안에 있는 이야기를 좀더 깊게 파헤친 것이 화인열전 1~2권이었으니 본의 아니게 읽는 순서가 딱 맞았다. 명작순례를 읽으면서 짧게 짧게 나온 화가들의 이야기를 좀더 알고 싶었는데 여기에서는 그걸 다시 이야기를 길게 펼쳐놓아 읽는 내내 화인들의 에피소드에 즐겁고 그들의 인생에 안타까워했다.

조선시대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참으로 취급이 형편없어서 사대부 중에 그림 그리는 재주를 타고난 이는 평생 자신의 재능과 그리고자 하는 마음을 괴로워하며 보내기도 하고(관아재 조영석) 아예 타인의 시선을 ‘그럴 테면 그렇게 보아라’ 라는 태도로 초연하게 극복해나가며 자신을 끊임없이 발전시킨 사람도 있었고(겸재 정선) 사대부가 아닌 중인으로 태어나 그림에 재능을 가진 이들 중에는 자신의 재주로 좀더 세상에 이름을 제대로 떨칠 수 없음에 독하게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는데(호생관 최북) 제각각의 이야기가 애절하기도 절박하기도 해서 어지간한 소설보다 몰입했다.
대부분의 사대부가 아닌 전문화가들은 태어난 해와 떠난 해를 정확히 아는 경우가 드물고 단원 김홍도 정도 되는 사람조차도 정확히 언제 세상을 등졌는지 알 수 없으니 그 시절 화가에 대한 취급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명작순례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우리나라의 ‘그림 이야기’는 단순히 그림의 표현법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사상들까지 모두 꿰어야 제대로 보여서 아무래도 쉽게 쓴 미술 서적들이 드물고, 그렇기에 이런 장르의 책을 쓰기에는 이 작가만한 적임자가 없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근간보다는 이 책을 훨씬 높게 치고 싶다.
명작순례에서 이 두 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근래 읽은 책 중 정말 즐겁게 읽은 세 권이었다.

덧.
나는 정말 손재주가 박해서 어릴 때부터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참 부러운데 지금까지 만난, 그림을 공부하거나 잘 그리는 사람들은 높은 비율로 어딘가 ‘강퍅하거나’ ‘까칠한’ 면이 있는 편이었고 그게 또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더랬다. 이 책의 호생관 최북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보니 문득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일면이 생각나면서

정약용이 말하길,
한번은 어느 재상 댁에서 그림을 펼쳐보는데 그 집 자제들 말이 “우린 도무지 그림을 모르겠어” 하고 말하니, 최북이 당장 발끈하면서 “그림은 모르겠다니, 그럼 다른 것은 안다는 말이냐” 하고 쏘아붙였다.

라는 구절에 무심코 웃었다. 나 이런 사람 너무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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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esponses

  1. amelie

    리뷰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책이 궁금해지네요. 걍팍하다가 무슨말인지 몰라 찾아봤네요 ㅎㅎ 인용구를 보고 생각난 인물은 화가아니고 정재형님..왜지? ㅋㅋ

    1. Ritz

      뭔가 창작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좀 거침없이 말하는 면이 있는 거 같아요. ^^ 실력있는 사람이 저러면 멋있는 거고 아닌 사람이 저러면 그냥 성질이 더러운 거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