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학교 때 반 강제로 읽어야 했던 한국 근대 소설 속 주인공들을 작가가 한 세계 안에 넣어 이리저리 오려 붙여 만든 한 편의 콜라쥬 같은 작품으로 「태평천하」의 윤 직원(나는 태평천하보다는 삼대가 더 취향이었음)과 「운수 좋은 날」의 인력거꾼이 한 공간에서 서로 스쳐가는 식이라 꽤 재미있었다. 일종의 한국 근대문학 유니버스…?;(별로 밝지는 않은 세계관일세…)

종로 대로는 달리는 자동차와 전차의 경적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 속에 인력거꾼 김 첨지가 바람 소리를 내며 달렸다. 김 첨지의 인력거 안에는 남촌 조지아 백화점 앞에서 탄 민 주사와 안성댁이 있었다. (중략) 그 시각 춘심이는 윤 직원의 사랑방에서 내일 미쓰코시 런치를 사달라며 조르고 있었다.

p.249

그리고 저 소설들을 읽을 때는 어떻게 생겼을지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작품 속 ‘공간’에 대해 차근히 풀어주는데 의외로 이야기거리가 많다.

경성으로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도시형 한옥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서양 문물이 들어오니 돈 있는 사람들이 짓기 시작한 (온돌 없는) 서양식 주택인 문화주택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흥미로웠던 건 다방과 카페에 대한 이야기.

커피가 들어온 후 차를 팔고 마시는 장소로 ‘다방’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호텔식 다방이 아닌 근대적 다방의 원조는 일본인이 23년경에 개업한 ‘후다미’였고, 조선인이 처음으로 개업한 다방은 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이 연 ‘카카듀’였다는데 프랑스의 비밀 아지트 이름을 따서 지은 이곳은 3층 벽돌 건물에 실내는 인도풍 인테리어였다고 한다(가게 이름은 프랑스 어인데 실내는 왜 인도…).

배우 심영과 김인규가 운영했다는 ‘멕시코’. 창 모양이 개성있어서 유심히 봤다.
요즘 한참 레트로가 붐이던데 이런 걸 참고해서 만드는 곳도 생기면 재미있겠다.
출처 서울 스토리

그 뒤로 29년경 영화배우 김인규가 종로 YMCA 회관 근처에 ‘멕시코’를 열었고 30년대에는 소공동에 ‘낙랑파라’, 이상의 ‘제비’, 유치진의 ‘프라타나’ 등등, 서양문물을 경험한 해외유학파나 문화 예술인들이 유럽의 살롱 문화에 대한 동경을 듬뿍 담은 이름을 지은 다방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지금의 핫플레이스 카페들이 그렇듯 제각각 나름의 포인트가 있었다고 한다.

다방을 찾는 예술가들은 ‘차만 파는 다방’과 ‘차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다방’으로 분류했는데, 전자는 아무래도 회사원이나 상인 등이 주로 찾는 캐주얼한 분위기가 많고 후자는 예술가들이 원하는 문화공간에 가까워서 차값도 다소 비싼 곳들이었는데 슬프게도 이 ‘차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다방’들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금난으로 폐업하는 경우가 많았단다.

그러나 식민 도시 경성의 다방은 낭만적인 문화공간만은 아니었다. 다방은 갈 곳 없는 예술가들이 하루 대부분을 소비하고, 고학력 실업자들이 피곤한 얼굴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벽화’와 ‘금붕어’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벽화’는 차 한잔을 시켜놓고 두세 시간이 넘도록 그림처럼 앉아 있는 사람을 말했고, ‘금붕어’는 ‘벽화’와는 반대로 하루종일 이 다방 저 다방을 돌아다니며 물만 마시는 사람을 일컬었다. 소설가 구보는 하루에도 여러 번 낙랑파라와 제비를 돌아다니는 ‘금붕어’였고, 삼청동 꼭대기 집에 사글세 사는 박준구는 찻값이 싼 다방을 골라 붙박이로 붙어있는 ‘벽화’였다.

p.156

저 물만 마신다는 금붕어 이야기에 혼자 한참 웃었다. 아무리 공들여 만들어놔도 돈 내는 사람이 없으면 가게가 유지될 리가 없으니….😑

반대로 카페는 ‘여급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시는 곳’이어서 다방에서 고용하는 여성은 대개 계산대를 지키는 마담이지만, 카페에서 고용하는 여성은 남성 손님들에게 술을 파는 접대부였고 다방이 이국적이고 모던하고 개방적이라면 카페는 장식적이고 폐쇄적이고 큰 간판과 네온사인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이름도 왕관, 올림픽, 목단, 평화, 드라곤 이런 느낌이었고 퇴폐적인 분위기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해서 31년에는 카페를 단속하기 위해 카페 환경에 대한 규칙을 따로 공표해야할 정도였다고.

아마 저 때의 다방과 카페의 개념은 일본에서 그대로 넘어왔던 것 같고 어찌 보면 지금과 반대인데, 문득 언제부터 카페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카페의 개념이 됐을까 궁금해진다.

다 읽고 나니 100여년 전의 경성은 그때도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고 빈부의 차는 심했으며 지금처럼 우후죽순 다방과 카페가 늘어나고 있어서 100년 전의 이야기를 읽는데 자꾸 2020년의 지금이 생각나는 책이었다.

등장한 작품들은
강경애의 「인간문제」
김사량의 「천마」
김유정의 「따라지」
박태원의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방란장 주인」, 「성탄제」
이기영의 「고향」
이태준의 「복덕방」
이효석의 「성찬」, 「화분」
채만식의 「태평천하」, 「레디메이드 인생」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피아노」 등
이라는데 나는 저 중에 절반쯤 읽은 것 같다.
이 책 작가는 정말 저 작품들을 엄청나게 독파했는지 상당히 그럴듯하게 하나로 모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소설과 건축이라는 장르의 교차가 신선해서 이 작가의 다른 책도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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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sponses

  1. 읽어보고 싶네

    1. Ritz

      가볍게 술술 읽혀서 재미있게 봤음. 저 작가 다른 책도 오늘 빌려왔는데 그것도 괜찮더라고.

  2. 온돌 없는

    1. Ritz

      저도 읽으면서 저 비싸게 지은 집에 왜 온돌을 빼?! 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살던 사람도 대부분 옆에 다시 한옥집 짓고 나와 살았다는 글 보고 웃었다니까요. -_-

      1. 온돌 그것은 한국인의 얼…(아무말)

        1. Ritz

          그때 겨울이 지금보다 추웠을텐데 바닥에 불 안 들어오면 집이 아무리 좋아봤자….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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