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괴물을 보고 왔습니다.
일부러 인터넷에서 괴물의 괴자만 들어가도 안 보고 피해다니면서 거의 사전 지식 없이 보러 갔는데 정말로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였습니다.

포장은 블록버스터인데 뚜껑을 열어보니 꿀꿀한 정서의 ‘운수좋은 날’이었달까요.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플루토를 보면서 ‘이 사람이 아톰을 그리면 이렇게 음울한 분위기가 나오는구나’ 했던 것처럼 봉준호 감독이 괴수물을 만들면 괴수물도 이렇게 꿀꿀할 수 있구나 하고 새삼 느꼈습니다.

괴물이라는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를 우리가 사는 세계에 던져놓고 잔인할 정도로 덤덤하게 그 현실을 그려나가, 제목은 괴물인데 다 보고 나면 괴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고 결국 철저하게 주인공 가족만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바닥을 구르며 오열하는(이것도 정말 너무나 한국적이라고밖에는… 이산가족 상봉할 때 보면 울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 ^^;) 가족을 찍어대느라 정신없는 기자나 기껏 밀봉하듯 데려와놓고 병원에 휙 던져놓고 무심한 의사들, 이 모든 것들이 너무 피부로 와닿아서 오히려 내일이라도 한강에 괴물이 등장할 것만 같았군요.

역시 좋은 영화란 배우들의 연기가 좋은 영화이기도…

살인의 추억 때처럼 여전히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은 연기를 너무나 잘하고 각 캐릭터들의 존재감이랄까, 무게 배분도 적당했습니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송강호의 존재감은 좀 약했고 배두나는 출연 장면에 비해 기억에 강하게 남더군요. 보면서 정말 저 배우는 어디까지 변신할 수 있는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던 건 역시 박해일이었고 배우의 재발견이라고 극찬받는 변희봉 씨의 연기는 더 말할 것도 없었군요.
저는 약간 러닝 타임이 길다고 느꼈는데 대나무숲은 별로 그렇지 않았다고 하니 이 역시 개인적인 취향인 듯하고…

요즘 인터넷 뉴스들에서 일본에서 흥행 성적이 좋지 않다는 점에 대해 기사가 많던데 일본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본 김에 몇 가지 이야기를 하자면

  1. 한국 사람이 이 영화를 보면 씁쓸한 블랙 코미디인데 일본 사람이 보면 그냥 비극이 되더군요.
    이전의 살인의 추억에서도 그랬지만 어찌나 현란하고 아름다운 비속어들이 난무하는지 심각한 장면에서도 한국 사람들은 씁쓸하게나마 웃으면서 볼 수 있지만 일본어 자막에서는 그걸 제대로 살릴 수가 없으니 대부분 ‘칙쇼’와 ‘바카’ 정도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괴수물’로 홍보를 하고 있는 듯한데, 전통적인 ‘괴수물’을 보러 온 일본인들은 난데없이 가족애가 넘치는 비극을 보게 되는 셈이지요. 옆에 앉은 일본인 커플과 제가 동시에 같은 반응을 한 건 라스트에 배두나가 활을 날리는 장면 딱 하나였습니다.
  2. 너무나 한국적이어서 한국 사람이 아니면 모를 이야기와 정서가 좀 많았습니다..;
    박해일이 화염병을 만드는 장면이라든지(이 장면 보면서 저랑 대나무숲은 그 손놀림에 거의 넘어갔음) 아버지가 동생들에게 큰아들을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정서 같은 건 일본 사람들은 봐도 잘 와 닿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야 한국 사람이니, 실제로 한강에서 저렇게 뜬금없이 괴물이 나타났다고 하면 어떤 혼란이 벌어질 지 깊게 다가오지만 외국인들이 보기엔 한강에 괴물이 나타나나 템즈 강에 나타나나 별로 차이가 없을테니 말이죠. ^^; 실제로 대나무숲 회사의 일본인 직원이 영화를 보고 와서 ‘맥락을 모르겠다’고 했다고 하네요.

한국 사람이 보면 9점, 일본 사람이 보면 그럭저럭 6점 정도일 듯.

영화는 캐러비안의 해적을 봤던 멀티플렉스에서 마지막 시간 상영으로 봤는데, 영화관이 별로 도심에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평일 늦은 밤이어서 그런지 관객은 저와 대나무숲을 포함해 10명이 좀 안 됐네요. ^^;
그 중 일본인은 저희 옆에 앉은 커플과 좀 떨어진 자리에 앉은 연세가 좀 있으신 아저씨 한분 뿐이었고 분위기로 보아 나머지는 모두 한국인이었던 듯합니다.
영화는 좋았는데 정말 이 앞쪽에 앉았던 한국인 남자 두분이 나라 망신 다 시키더군요.
일본은 영화관에 맥주 한두캔 정도는 갖고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 두 분은 이미 어디서 거하게 취해서 마무리로 맥주를 사서 들어오셨는지 앞에 앉아서는 꼭 실성한 것처럼 큰 소리로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킬킬킬 웃으며 발을 굴러댔습니다. 옆 자리에 앉은 일본 사람들에게도 민망하고 영화를 보는데도 어찌나 방해가 되던지 불 켜지면 얼굴이라도 꼭 보고 싶었건만 영화 끝나는 시간이 늦어져 열차 시간 때문에 서둘러 나오느라 확인을 못한 게 천추의 한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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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sponses

  1. 하임맘

    볼 수만 있다면…ㅠㅜ

    1. 리츠코

      -.ㅜ

  2. 안 그래도 괴물이 일본서 괴물을 ‘최고의 괴수 영화’ 이렇게 광고했다가, 오타쿠들의 반발을 사서 힘들었다는 기사가 떴었다네.
    그나저나, 내 주변 사람들은 한강 물을 보고 있으면 괴물이 나올 거 같다는 후유증에 좀 시달리더라^^

    1. 리츠코

      그 마케팅이 완전히 실패였던 것 같음. -_-
      이 사람들이 볼 때 괴물은 괴수 영화가 아니겠더라고. 그러니 괜히 괴수물 오타쿠들만 건드려서 초반에 초칠한 듯..-_-;

  3. 미사

    맞아… 전부터 생각했지만 봉준호 감독은 한국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해서 오히려 그 점에 발목을 잡힐 수도 있다고 보는데…
    하지만 역시 한국을 구한 건 386의 화염병과 양궁인가 -_-?

    1. 리츠코

      봉준호 감독의 한국적인 면은 세계적으로 먹힐만한 보편성이 좀 부족하더라구요.
      언니 말을 듣고 보니 감독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그거였을지도?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