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해마다 10월에 린양 생일과 결혼기념일을 합치거나 아니면 1월에 내 생일과 옆사람 생일을 합쳐 해외로 여행을 가는데 올해는 겨울에 따로 준비한 계획이 있어서 10월에는 예정이 전혀 없었건만 갑자기 두주 전에 급하게 표를 끊고 집을 나선 건 결혼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일본에 건너가 살면서 친정엄마나 마찬가지일 만큼 여러가지로 도움을 받았던 친척언니(이 블로그에 오래 전부터 오던 사람들이라면 내가 일본 있을 때 워낙 자주 이야기해서 기억할만한) 남편이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는데 언니에게 전화를 하니 여러모로 외로우셨는지 ‘누구라도 보고싶다’고 하셔서 그만큼 신세를 졌는데 사람 노릇은 해야지! 하는 마음이었더랬다.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언니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나선 길이라 어디 놀러다닐 예정도 없이 숙소도 언니네 집이 가까운 가와사키역 근처로.
2박 3일 일정이었는데 출발하는 날은 새벽 이른 시간 비행기라 도착하고 하루종일 여유가 있어서 그 날은 일본에서 지내고 있는 지인들을 만나고 두번째 날은 하루종일 언니와, 마지막 날은 비행기 시간은 늦은 편인데 그렇다고 어디 다른 곳으로 갔다 가와사키로 다시 돌아오기도(짐을 숙소에 맡겨놔서) 부담스러워서 가와사키 역에 붙어있는 라조나 안에서 슬렁슬렁 구경도 하고 카페에서 차도 마시며 현지인 놀이(?) 하다가 공항으로 향했다.

도착한 첫날 점심은 미조노구치에 살고 있는 시온이네와.
3년만에 간 미조노구치는 여전히 변한 게 별로 없고 실물로는 처음 만난 시온이는 페이스북에서 사진으로 자주 봐서 그런지 마치 원래 가끔 만나던 아이 같고… 😀
마루이에서 식사를 한 후 케이크에 차 한잔 마시러 시온이네로 가는 길에 갑자기 생각나서 모로조프Morozoff 치즈 케이크 집에서 케이크를 하나 사봤는데 여전히 맛있었다. ㅠ.ㅠ (나는 이 집을 사는 내내 지나쳐 다니다가 거의 출국 얼마 안 남기고 미사언니 덕에 유명한 집인 줄 알았다…; )
맨 아래는 긴자 코지의 말차 크레이프.

나는 비행기에서 좀 잤는데 알고보니 린양은 비행기 안에서 한숨도 안 잤던 상황.(티켓팅하다가 좌석이 멀어져서 옆사람과 린양이 같이 앉고 나는 뒤쪽에 따로 앉았다)
애 상태가 메롱해서 시온이네서 린양은 안 자던 낮잠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다시 길에 나섰다.

저녁 약속은 타향에서 로동중인 개굴님, 디노님과 츠키지 스시잔마이에서 조인.(그 와중에 페북에는 아윰님이 가와사키 역 근처에 배회 중이시라는 답글이… 일본에 왜 이렇게 아는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나…)
도쿄에 와도 츠키지까지 일부러 갈 일은 잘 없어서 나는 한 10년만에 간 셈인데 그 사이에 가격이 하나도 오르지 않은 점에 놀랐고 맛은 여전히 그 가격에 비하면 여전히 훌륭. 린양도 세트 하나를 다 먹어치웠다.

다섯명이 앉아 식사하면서 두런두런 한 이야기는 최근 오사카 건 때문인지 츠키지 초밥의 와사비가 너무 소심하게 들어가있는 듯하다는 것과 스시잔마이 자체가 외국인들에게 주로 유명한 가게가 되어서인지 손님의 대부분이 관광객으로 보인다는 점?
요즘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다길래 오래 기다릴까봐 5시에 약속을 잡았는데 이게 절묘하게 시간대가 잘 맞아서 우리가 들어갈 때는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나올 때는 가게 앞이 바글바글했다. 중국인 비수기인지 이번에 여행다니면서 유난히 중국인이 눈에 안 띄었던 점도 특이하다면 특이한 사항이려나.

나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디노님 만난지는 한달도 안됐었구만)이랑 차라도 한잔 더 하고 싶은데 옆사람도 린양도 피로가 머리 끝까지 차오른 느낌이라 두 사람 먼저 숙소로 돌려보내고 역 가는 길에 적당히 보이는 스타벅스에 들어갔는데 이번 일본 한정 티바나 메뉴는 이름도 엄청 거창한데 한국쪽보다 더 맛은 있었다. 

왼쪽은 ‘넥타린 피치 프라푸치노 with 티 바바로아’라는 풀 네임으로 주문하려면 혀 깨물 것 같은 이름, 오른쪽은 넥타린 피치 앤 크림 티.

한시간 좀 넘게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헤어졌는데 옆사람이 먼저 출발해서 숙소 도착하더니 가는 길이 만만찮다고 조심해서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서 ‘그래봤자 전철 갈아타고 가는 건데 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출발했는데…

저 히비야에서 유라쿠초로 갈아타는 도보 4분이 역 바깥으로 나와서 아예 다른 역으로 가는 길일 줄이야. -_- 저런 동선은 추천 안 하는 게 낫지 않냐, 구글님아.
히비야 역에서 JR 유라쿠초 역으로 가는 표지판을 보고 나왔는데 해가 다 진 도심 한복판에 건물들만 보이고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는 하나도 모르겠는 상황. 결국은 근처에서 도로 공사중이시던 아저씨들 붙잡고 물어물어 찾아갔다. 😐
그러고 유라쿠초에서 가와사키 방향으로 전철을 탔는데 갑자기 전차가 한 정거장을 앞두고 종점이라며 승객을 다 털어버리고… 내렸다가 굳이 다음 열차를 타고 한 정거장 더 가서 가와사키 역 도착. 아놔, 나 오늘 일진 왜 이래… orz

숙소에 도착하니 급하게 잡느라 미처 확인 못하고 하나 남은 방을 잡은 게 흡연실이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으나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혹시 내일이라도 방이 비면 바꿔줄 수 있겠냐고 문의했더니 다행히 공실이 있었는지 그 자리에서 바로 바꿔줘서 한시름 돌렸다.

린양이 개굴님에게 선물받은 사쿠라 쿠키. 틴도 엄청 예쁜데 쿠키도 먹기가 아깝게 생겼다 😯

대충 짐도 풀고 그래도 결혼기념일인데 그냥 지나가긴 아쉽지 하며 옆사람은 간단한 주전부리를 구하러 출발.

매실과 시소향이 어우러진 오묘한 사와와 내가 좋아하는 호로요이.
그리고 맥도날드에서 베이컨 감자 파이와 10월이면 할로윈이 최대의 축제인 일본다운 감자튀김을 구해왔다. 감자튀김은 맛이 없었던 건 아닌데 앞으로도 굳이 감자튀김을 단 맛과 섞어 먹는 건 피하는 걸로…

하루종일 알차게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결혼기념일이었다.